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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난 인문학 Nov 26. 2024

모짜르트와 마리아 앙뚜아네트의
인연

나는 자주 모짜르트 음악을 듣는다.

특히 걷기 운동을 할 때면

경쾌한 그의 음악을 자주 듣는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그에 대한 기사들을 찾아보곤 하는데

마리 앙뚜아네트와 관련이 있어

읽어보니 재미있다.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짜르트는

이미 5세때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6세때부터 유럽 각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아마도 돈벌이 수단으로 아들을 이용한 것 같다.

그러던 중 빈에서 그의 나이 6세에

당시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이지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무대 앞으로 향하던 그는 긴장한 탓인지

넘어졌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소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긴장했지만 당돌했던 모짜르트는 그녀에게

“고마워..나중에 커서 나와 결혼해줄래?”라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관중들은 어린 아이들의 소꿉 놀이에

폭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소녀가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연주가 끝나고 감탄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여왕님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그의 어린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14세 때 합스부르크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결혼해서

왕비가 된 것이다.

그녀의 집안 위세나 그녀의 미모에 어울리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그녀는 유폐되었다.

그녀는 왕비가 되어

배고픈 하층민을 위해 감자 심기를 장려했다.

또한 진실인지 악의적 누명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빵이 없다는 말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해 공분을 샀다.

그녀는 이렇게 왕비로 극도의 사치를 부리고

서민들과는 단절된 삶을 살아갔다.

프랑스로 시집온 그녀는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

이것이 불행의 시발점이다.

그녀는 비교적 자유스러운 오스트리아에서 자랐고

프랑스에 왕비가 되었지만

문화의 차이는 현격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왕가의 일을 마치면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 생활했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국민들에게 악성 루머가 많이 돌았다.

아마도 당시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도 얼마간 있다고 보여진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루이 16세를 설득해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자고 제안 하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민 투표로 남편인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자녀들과 떨어져 감금되고

재판 결과 사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감옥에서 입고 있던 허름한 옷차림으로

단두대에 올라서야만 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의 격한 욕지거리를 받으며

단두대에 섰다.

기록에 의하면 단두대에 설 때까지

그녀는 왕비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날, 연주회가 있던 그날로 돌아가

음악 천재가 했던 고백을 받았더라면

마리 앙뚜아네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의 잘린 목은

남편인 루이 16세와 아들의 심장과 함께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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