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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강요하는 사회

by 바람난 인문학

배우 김새론이 16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녀는 음주 운전으로 미운털이 박힌 배우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 대해서

가멸차게 비난한다.

당사자가 생을 마감하면

그제서야 악플은 멈추고

추모하는 분위기로 돌변한다.

이게 무슨 건강한 사회인가?

죽기 전에 보듬고 이해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사람이 죽어 나가야 악플러들은

그 얄팍한 손가락질을 멈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 뒤이다.

이제 겨우 25살, 어린 나이다.

그녀가 살아온 25년 동안

그녀가 저지른 잘못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생명을 앗아갈 만큼 그렇게 무거운 것인가?

물론 그녀의 음주운전을 감싸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한번 실패한 것에 대한

포용성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음주운전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시험도

사업가의 실패도

한번 잘못하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런 사회가

우리 사회다.

이런 참혹한 현실이기 때문에

아마도 김새론씨도 편의점에 알바까지 하면서

다시 시작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싸늘한 언론과

사람들의 야유는 더 이상 그녀를 견디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역지사지 정신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유명인이 뭔가 반사회적인 사건을 일으키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보다 더 심한 취급을 하니

견딜 수가 있겠는가?

물론 모든 책임은 본인한테 있다.

본인이 잘못했으면 반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 상의 테러가 가중된다면

그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잘못을 하고 뻔뻔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빌고 대중이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할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견뎌야 하는 것이 맞다.

다만 그 수위가 너무 가혹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경직되어 있고

남의 잘못에 용서할 마음이 너무나 좁다는 것이다.

나의 딸이요

나의 아들이라고

감쌀 수는 없는지?

포용하는 사회가 탄력성이 있어

회복도 잘 할 수 있다.

무조건 비판하고 돌멩이를 던지기 전에

한번 큰 마음으로 품을 수는 없는지 모르겠다.

잘못을 용서하면

건강한 시민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

단죄가 능사는 아니다.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도 하게 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올 수 있게

문을 열어주면 훨씬 빠른 속도로

정상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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