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17
어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아시아 최초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이 타이틀이 너무 자랑스럽고, 멋진 순간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성의 글은 힘이 있다는 것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발화되지 않은 존재들, 재현되지 않았던 존재들이 세상에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의 소식에 힘을 얻어, 다시, 난 여름을, 여름들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을 위해 항상 짧게라도 여러 메모들을 해두는데, 오늘 그 메모들을 다시 수첩에 옮겨 적었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 항상 새로운 수첩을 하나씩 산다.
<방문>이라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엔, 3개 정도의 수첩을 썼다.
6년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3개의 수첩은 어쩐지 무척 작지만.
<여름, 기록>이라는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2019년이었는데, 제대로 촬영을 시작한 것은 2022년이 되어서였다.
그 사이사이 나는 여러 이야기들을 시작했다고 덮어버렸고, 지우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막연하게 그냥 '여름을 기록하자'라고 카메라를 들었던 것이 2022년의 어느 늦은 봄이었다.
여름이 오려는지 낮이 되면 제법 더웠고, 반팔을 입어야 했다. 동네의 뒷산은 조금씩 푸르러졌고, 그늘에 앉아있으면 간간이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 바람이 제법 상쾌하고 시원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봄과 여름의 어떤 사이였다.
언제부터일까.
줄곧 난 '여름 속에 있다'라고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해도 내 안의 시간은 아주 뜨거운 여름에 멈춰있었다.
그 한 여름 속에 갇힌 나는 그냥 모든 기억을 여름이라는 계절과 연상하여 생각했다.
꽃이 피던 여름,
선풍기가 있던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
빨갛게 단풍이 든 여름,
눈이 내리던 여름.
언젠가 나도 이 여름을 잘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런 어떤 바람으로 시작한 작업이 <여름, 기록>이다. 나의 여름 속에 함께 살고 있던 지나간 날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그 기억을 기록해 보자는 것이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야기는 또 많은 여름들을 지나왔고, 많은 여름의 기억을 남겼다.
그 기억들을 부둥켜안고 여름을 지나오는 동안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 이야기는 필요한가'
사실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애초에 필요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과거는 현재를 구하는가. 현재는 과거를 구하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언젠가는 지금의 내가 아주 먼 미래의 나를 위로하길.
오늘도 나는 이 지독한 여름 속에서 어떤 과거와 현재의 '여름들'의 목소리들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