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늙어 간다는 건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막상 그 시간에 직면하게 되면 서글프기도 하고 답답해지는 건 누구나 언젠간 겪어야 하는 숙명이 아닐까?
우리 엄마의 가정주부로서의 살림경력은 어림잡아도 50년은 될 것 같다. 어떠한 일이든 50년을 해오면 누구나 달인 정도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엄마시지만 아침이면 여전히 일터로 나가는 쉰둥이들 (J와 나를 엄마는 가끔 그렇게 부르신다)을 대신해 77세의 노모는 여전히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신다.
흔히 집안일을 끝이 없다라고들 표현한다. 설거지를 끝내면 청소거리가 청소를 끝내면 빨랫감이 눈에 들어오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또다시 돌아오는 식사시간의 무한반복. 예전엔 아내, 엄마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이 끝없는 집안일들이 차츰 가족 구성원들과 분업화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가정에서 엄마들의 역할은 크다.
한 직장에서 50년을 일했다면 누구나 은퇴를 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 살림이라는 직종은 딱히 은퇴의 시기가 정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50년 경력의 엄마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대신 엄마는 당신이 더 이상 하기 힘든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계신다.
우선 3년 전부터 김치를 담그지 않으신다. 엄마의 김장김치를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엄마의 현명한 판단이 공존하는 이 시기에 우리 가족은 인심 좋은 주변 이웃들과 학가산 김치(마트에서 파는 공장김치 중 가장 우리 가족의 입맛에 맞는다.)의 도움을 받아 아직까지 별 불편함 없이 잘 먹고 산다. 청소 역시 2년 전부터 로봇 청소기(물 걸레질까지 되는 기종)의 도움을 받고 있다.
주말이면 한 번씩 J와 내가 손 청소도 하고, 계절이 바뀔 때면 코인 빨래방에서 이불과 큰 빨래들을 돌려오기도 한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처럼 사람 사는 게 닥치면 다 살게 된다. 그 또한 인생의 또 다른 맛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아쉬움과 미안함에 풀 죽어하시던 유여사님께서 시간이 지날수록 반쪽의 해방감을 즐기셔서 참 다행이다.
“쉰둥이들아, 오늘 저녁은 고기 먹자. 퇴근할 때 문자 해. 시간 맞춰 고깃집에 주문해 둘게. 집에 오는 길에 찾아오렴.” 퇴근 무렵, 가족 단톡방에 올리시는 유여사님의 저녁 메뉴는 다양해지고 있다.
평생 수 백 번을 만들었을 콩나물을 무치고, 장조림을 조리고, 깻잎을 재시면서 입맛이 예전 같지 않아 간을 못 맞추시겠다고 당신이 만든 음식에 자신 없어하시는 엄마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가끔 당신 몰래 눈물도 훔쳐보지만, 그녀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음을 이 땅의 모든 자식들은 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음식은 미각으로만 먹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나를 키워준 힘이고, 엄마의 사랑이기에 그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정성을 천천히 곱씹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냉장고 문을 열고 무엇을 꺼내려고 열었는지를 답답해하시는 그녀가 만들어 주신 이 귀한 반찬 한 가지에 따뜻한 흰쌀밥 한 그릇이면 우리는 충분히 배부르고 감사하다. 이 감사한 밥상을 앞으로 긴 시간 더 먹고 싶다.
그녀의 기억이 더 흐릿해지고, 혀 끝의 감각이 더 무뎌져서 소금국에 생 콩나물 무침을 먹더라도 엄마가 만들어주신 그 귀한 밥상을 긴 세월 먹고 싶습니다.
엄마, 당신은 언제까지나 최고의 가정주부이십니다. 당신의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쉰둥이들 걱정 마시고 오늘 저녁도 엄마 드시고 싶은 음식 단톡방에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