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계절은 얼핏 보면 가늠하기 힘들다.
잎의 풍성함의 차이는 있지만, 4계절 내내 푸른 녹음이 시들지 않는다.
한라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가을에도 단풍이 지질 않고, 겨울에도 꽃이 피어 있다.
눈이 오는 건 중산간 위로나 올라가야 볼 수 있으니 시각적으로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살아보면, 각 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3월이면 쑥과 냉이도 올라오지만, 오름과 산 중턱엔 고사리가 밭을 만든다.
지천에 널린 고사리를 꺽다보면 어느새 봄의 여왕 벚꽃이 피고 진다.
짧게 왔다간 벚꽃이 아쉬워지기도 전에 서귀포는 천상의 향기, 귤꽃잎 향으로 뒤덮인다.
귤꽃 향에 취해 5월을 보내고 나면, 서귀포의 여름이 시작된다.
서귀포의 여름은 무척 길다. 긴 장마가 시작되면, 일손을 잠시 멈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오면 풀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동이 트기 전부터 매일 쑥쑥 자라는 잡풀을 제거하기 위해 돌려대는 예초기 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습하고 뜨거운 서귀포의 여름을 식히기 위해 바다와 계곡을 다니다 보면
어느새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오면 제주의 동쪽과 서쪽에선 밭작물을 수확하느라 쉴 틈이 없고
오일장에 나가 제주의 신선한 기운을 감사히 사 먹는다.
서쪽의 억새밭에 앉아 해가 지는 걸 보고 있으면, 이게 가을의 모습이구나 싶다.
귤나무의 귤이 노랗게 익어가면 겨울이 시작된다.
서귀포의 겨울은 귤 수확철이라는 의미가 더 큰 곳이다.
귤나무에 노란 귤이 점점 없어질수록 겨울이 가고 있음이다.
가는 겨울이 아쉬워 제주 할망산에 눈 구경을 몇 번 다녀오면 어느새 한 해가 마무리 된다.
서귀포의 4계절을 글로 옮기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어휘력으로 내가 경험했던 황홀한 감정을 충분히 옮길 수 없음에.
더 잘 표현하고, 더 생생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글 쓰기에 서툰 나에게만 이 답답함이 드는 건 아니었나 보다.
미숙한 글로 행복한 시간을 표현하고자 했던 답답했던 마음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본문을 빌어 대신 전하고 싶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中에서)
하루키는 자신이 맛본 위스키를, 언어라는 기호체계로 바꾸는 과정에서
무미건조한 심상으로 전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안타깝게 여겼다.
지금의 내 심정이 딱 그렇다. 서귀포의 4계절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직접 살아가며 느껴보지 않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여행지로 서귀포를 단편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행복한 시간이지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인생의 한번쯤은 서귀포의 사계절을 꼭 경험해 보시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