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공정한 게임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그리고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by 링링

<자기만의 방>을 읽지 않아도 이 책의 대표적인 주장을 다들 알고 있을 텐데, 바로 고정적인 소득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여성이 픽션을 창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 내내 작가는 남성 작가가 쓴 여성에 대한 고찰 그리고 당시 여성작가의 출판 도서들을 읽고 감상을 나눈다.


책을 읽는 내내 한숨을 멈출 수 없었다. 우선은 감탄의 한숨이다, 어쩜 사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고 서술했는지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어서 아쉬움의 한숨이었다. 작가와 나는 100년이라는 시대적 간극이 있다. 그런데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그동안 불평등을 사회가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한숨이었다.


(민음사 기준 p.161)

이 모든 논의에서 내가 물질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며 여러분이 이의를 제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간 500파운드란 심사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폭넓게 상징적인 해석을 붙인다 하더라도, 마음은 그런 것들을 능가해야 하며 위대한 시인들은 종종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반박하겠지요. 그렇다면 시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여러분의 문학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아서 퀼러 쿠치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난 백 년 동안의 위대한 시인들은 누구인가? 콜리지,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랜더, 키츠, 테니슨, 브라우닝, 아널드, 모리스…. 이들 중에서 키츠와 브라우닝, 로제티를 제외하곤 모두 대학 출신이며, 이들 세 명 중 한창 젊은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키츠만이 유복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었다. “


이 앞뒤 내용도 정말 곱씹어봄 직 하지만, 내가 더 이상 타자를.. 치기 귀찮기 때문은 절대 아니고,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러니까 이 책이 여성학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어서 이런 부분을 조명하는 것이 버지니아의 목적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내 글이니 만큼 요즘 더 관심 있어 하는 -- 능력, 시험만능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재작년에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정말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 해 읽은 책 중에서도 단연 1등). 이 내용을 이렇게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결국 마이클 샌댈도 버지니아 울프도 아서 퀼러 쿠치도 하고 싶은 말은 재능보다 앞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재능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사회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보다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또한 내가 얻은 좋은 결과는 전적으로 나의 덕택이라 보는 것도 오만함이다.


질 높은 공교육과 수준 높은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걸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받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 오히려 이런 교육 속에서 자신은 아주 공평하고 또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자신이 증명해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필수교육과정을 거치고 좋은 대학을 간 것을 업적으로 여기며 좋은 대학을 진학한 것이 연쇄적으로 취업에 영향을 주었으면 하고,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싫어한다. 전적으로 내 노력으로 만들어낸 내 것인데 굳이?


이것이 공정하다는 착각이고 편협한 사고에서 탄생한 오만이다. 나도 많은 것을 영위하는 여유로운 집 자제는 아니다만. 공부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축복임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을지도 모른다. 요지는 이들의 불행에서 나의 행운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열심히 했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갔고 그래서 좋은 직장에서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인데 그것을 왜 국가에서 세금으로 다 가져가는지 모르겠다는 류의 주장은 웃기다. 이들 중 대다수는 공평하지 않은 사회제도에 혜택을 받은 자들이다.


공포스럽게도 분명 Z세대는 사회적인 윤리에 관심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 리서치에서 자신이 여유 있어도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20대 남성에서 높게 나타났다는 기사를 동시에 보았다. 이게 공정하다는 착각이 가지고 온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할당제에 반대하고 높은 상속세에 우는 소리를 내고..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부유하지 않지만 항상 부유한 편의 손을 든다. 내 실패의 원인을 오롯이 자신에게서 찾게 한다. 사회 기득권층이 오랜 기간 대중들을 길들이기 위해 정성 다한 가스라이팅이다. 가지지 못한 자도 가진 자의 편을 든다, 왜? 내가 이후에 가진 자가 될 예정이라서? 가진 자의 편을 든다면 결국 난 가지지 못한 자로 평생 살 게 되는 것은 아닌가? 분명 사람은 만일의 상황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본능을 이길 정도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회 기득권층은 얼마나 오랜 기간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많은 것들을 주무른 걸까?


박완서 작가가 1975년에 발표한 <도둑맞은 가난>을 최근에 다시 찾아 읽었다. 섬찟했다. 어쩌면 내 상상보다도 기득권층의 음침함은 더 지독하고 깊숙할지 모른다. 그들은 남의 불행에서만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서사를 위해 거짓 가난을 탐낸다. 여느 한 정치인의 모습 같기도 하다. 자신 역시 공평한 방식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공평한가? 출생부터 불공평한데?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공평은 찾기 힘들다.


또 생각하다 보니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들에게 갑질한 사건도 생각났다. 자신이 공평한 세상에서 오롯이 나의 노력으로 성공했으니 나보다 성공하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그들의 인권, 노력들을 무참하게 짓밟아도 되는가?


내 말의 요지는 불공평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실패를 모두 사회적 구조에 돌리자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 전적으로 내 노력만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성공해서 불평등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유토피아로 보일지라도. 본래 인간의 목적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데 있음으로.


부의 재분배, 복지 사각지대 해소..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평등에 가깝게 이끌어야 하고 그 방향으로 가는 데에 동력이 되었으면 하는 것.. 이것은 내 아주 오랜 시절 동안의 꿈이기도 하며 모두의 꿈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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