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녹천에는 똥이 많다>
녹천, 까마득한 옛날 노루가 개울까지 내려와 물을 마셨을 공간이었을지도 모르는 이곳은 지금 공장 폐수와 오물로 동네 전체가 불쾌한 악취가 나는 공간이자 ‘준식’의 아파트가 있는 공간이다. 지하셋방에서 분양평수 23평에 이르는 아파트로 오기까지 준식은 급사에서 야간대학을 통해 어엿한 선생의 호칭을 얻었다.
그의 동생 민우는 어린 날 몇 년 같이 지낸 사이에 불과한, 성조차도 다른 형제다. 어느 날 자연스레 준식의 가족에 편입한 민우는 경찰의 말을 빌리자면, 운동권 중의 악질이자 대학생들과 노동자의 배후에 있는 존재다. 민우가 이 집에 들어온 순간을 계기로 준식은 그의 아내가 변화했음을 느낀다. 전과 달리 화장을 하거나, 팔이 어깨까지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을 하는 그녀는 종국엔 준식에게 “아무래도 우린 결혼을 잘못했나 봐.”라고 말한다.
민우가 준식의 삶 속으로 편입한 그 순간 가장 큰 변화를 마주한 건 준석의 아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 안의 낡은 장롱에 대한 이야기, 집에 수족관을 들이는 등 어떻게 꾸며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준식의 아내는 이제 준식에게 삶에 회의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와 함께 살아온 삶, 부부관계의 진실성에 물음을 던진다. 그러는 그녀에게 준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진실한 것과 진실하지 않은 게 따로 있느냐 묻는다.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들의 삶의 방식이 아니겠느냐면서.
준식은 부부관계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의 아내가 전부터 그에게 당부했던 수족관을 집에 사간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복통을 느끼고 유리상자와 물고기가 담긴 비닐 주머니를 든 채 화장실을 급히 찾는다. 그 과정에서 개발 중인 녹천의 한 공사장에 유독 많은 비닐 쓰레기에서 문뜩 연극 무대 장치를 떠올린다. 결국 자기네가 살고 있는 위풍이 당당한 고층 아파트는 거대한 쓰레기 퇴적층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쓰레기를 딛고 서 있는 아파트에서 그 공간을 다시 수족관과 같이 예뻐보이는 것으로 꾸미고 있다.
준식은 미래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나아온 그녀가 삶의 진실성에 대해 질의했다. 하지만 준식은 별달리 참신한 답을 내진 못한다. 지금과 같이 너무나도 뻔한, 운이 좋으면 더 큰 집으로 이사하거나 주임교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형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가 목표로 두고 달려온 아파트가, 안정적인 일자리가, 동생의 등장으로 더러운 쓰레기 위에 세워진 거짓의 삶으로 격하됐다. 마침내 준식은 겨우 찾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집으로 들어왔다, 허나 비닐 주머니는 찢어져 있었고, 금붕어는 죽어 있었다.
준식은 회식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논쟁을 벌인다. 아내에게 변한 태도를 지적하며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왔지 않았냐고 묻는 준식에게 아내는 그간 자신을 속여가며 잘 사는 척하며 살아, 행복하게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보람도 즐거움도 없었다고. 준식은 이 문제의 책임을 민우에게 물으려고 하자, 아내는 민우를 두둔한다. 이유인즉슨, 민우는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고생하고, 꿈과 이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격화된 상황에서 민우는 형수님을 이해하려 노력하라며 준식을 진정시킨다. 준식은 이에 그간 쌓아온 분노를 터뜨린다.
“이해? 그럼 너희들은 왜 날 이해하려고 하지 않냐? 그래, 난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놈이야. 꿈도 이상도 없이 그저 벌레처럼 살아가는 놈이야. 타락하고 비굴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넌 어째서 그렇게 도덕적이어야 하나? 왜 너만은 아직 도덕적이고 고상하게 살고 있나?...... 난 처음부터 네 놈이 기분 나빴어. 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냐? 넌 어째서 그 나이가 되도록 정의와 도덕을 위해서 싸우고 있냐? 너는 왜 나처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살지 않냐? 너는 무슨 자격으로 저 높은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을 수 있단 말이야.”
이에 민우는 준식은 준식의 방식이 있듯, 민우도 제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라 말한다. 아내는 떠나겠다는 민우에 자기도 이대로 살 수 없다며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문뜩 준식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악한 역할만 해왔다고 느낀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늘 어린 날의 비굴함으로 천신만고 끝에야 쌓아낼 수 있었던 가정이란 작은 성조차 동생의 등장으로 ‘알량한 자기만족과 허위 위에 지어진 초라한 모조품’ 임을 폭로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준식은 자신의 초라함을 못 견디고, 동생의 ‘선함’에 우발적인 감정으로 동생을 고발한다. 그 사이 민우는 다시 준식을 찾아가 아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전한다. 동생은 결국 경찰에 잡히고, 준식은 눈물을 흘린다. 결코 고발에 대한 죄책감도 후회도 아니었다.
감옥에 갇혀 순수함에 책임을 다할 민우도, 순결함과 품위를 잃어버린 준식도 결국 살아야 한다. 나아가야 한다.
이창동 작가는 늘 소통에 목말라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 인터뷰, 취임사 등 그의 족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직접적인 단어든, 간접적인 은유든 소통을 강조한다. 사회 모든 기형적인 구조의 해답으로 소통을 짚는다.
그의 소설은 영화와 또 다른 노골적인 방식으로 다가온다. 감독 이창동의 작품은 내내 미스터리로 가득 차 도리어 차가워 보인다. 허나 전작 <소지>와 그 이후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까지, 작가 이창동은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세상을 정의하거나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상을 내세우지 않는다. 작가들 대개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 속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민우란 인물의 도덕성, 뜻을 좇는 삶의 태도를 소설의 주제의식으로 삼을 것이다. 허나 본 소설에는 민우보다도 민우를 계기로 준식이 겪는 혼란에 집중한다.
준식이란 인물은 전형적인 시민상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형 보다 소위 말하는 ‘갓생 사는’ 시민에 가깝다. 급사에서 만족하지 않고, 야간대학을 병행해 종국엔 선생이 되었다. 그뿐인가, 그들 부부는 지하셋방에서 시작했지만, 아홉 번의 실패를 딛고 열 번째엔 녹천이란 개발 동네의 나름 23평 아파트에도 입주했다.
그의 아내는 같은 서무과 직원으로, 민우 등장 이전까지는 역시 준식과 비슷한 삶의 태도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편과 더불어 지하셋방에서부터 ‘안정된 생활, 잠잘 곳을 걱정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안온한 생활’이란 “행복한 삶”을 그렸다. 비록 준식 부부는 상호이해와 소통이 결핍된 가정이었지만, 이전까지는 가난으로부터의 도피란 공동의 목표로 가정을 지탱해 왔다. 소통의 부재란 큰 공동(空洞)을 덮어두고 지내던 부부는 민우의 등장으로 그 공동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부부는 각각의 방식으로 지난 세월 쫓아왔던 ‘행복한 삶’에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통해, 준식은 지금껏 쫓아온 결과가 '거대한 쓰레기의 퇴적층'위에 연극의 무대 장치처럼 '너절한 광목과 나무로 만들어진 속임수'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아내는 준식과 달려온 과정이 '겉으로만 그냥 잘 사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아내는 옳은 일, 꿈을 위해 살아가는 것만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며 부부가 그간 무시해온 공동의 존재에 환멸을 느낀다.
민우의 존재가 부부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근본적인 두 질문을 던진다. 순수한 태도로 뜻을 좇는 민우는 과연 완전무결한 인물인가? 그리고 물질적인 것으로 알량한 자기만족을 채우는 준식은 잘못된 것인가? 준식은 오랫동안 자신은 완전 악이며, 민우는 순수 선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했다. 민우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언필칭 자본주의 시대에, 준식의 삶은 가장 보통의 삶처럼 느껴진다. 차곡차곡 경제적 위치를 높이고, 집을 넓혀가고, 가정을 완성하고 그 안을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로 채운다. 급사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야간대학까지 병행해 교사라는 직장을 얻었으니, 나름 본받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야간대학을 병행하며 살아온 노력은 비굴한 행위고, 민우가 경찰에 쫓겨 남에 가까운 형에 집에 빌붙어 사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행위처럼 보이는 지점을 무엇일까.
그건 이 둘의 행위의 원동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민우의 원동력은 이상을 위한 추구고, 준식의 원동력은 안정성을 위한 발버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이야기 속에서 선과 악은 결코 도식화될 수 없다. 현실에서 눈치보지 않고, 모든 것을 초월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절대선은 아니라 생각한다. 동시에 안정성을 위한 발버둥은 불균형적인 사회가 초래한 현상이며, 현실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절대악은 아니다.
두 번째, 민우는 소설 속에서 완전히 설명되는 존재는 아니다. 독자들은 그의 신념부터 행보 그리고 연인관계까지 다 추측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민우도 준식의 말에 어떤 진심을 가졌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준식은 그런 형에게 이게 그의 삶이 방식이라고 대답하며 사과한다.
"형이 그렇게 사는 것이 형이 살아가는 방식이듯이, 내게는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야."
나는 민우의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이 말에 마음이 머물렀다. 민우가 신념 때문에 불안정한 삶을 사는 것, 준식이 안정성을 위해 살아가다가 행복한 삶을 정의하기 위해 혼란을 겪는 것. 그 외에도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다만 겉보기에 좋은 삶이 진정으로 제게 좋은 삶인지 여러 번 나와 또는 동반자와 소통해보기는 바란다. 결국 준식도 민우가 돌아가고 나서, 어떤 방식의 소통으로든 행복한 삶에 대해 정의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