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流水)

by 레이크스트림


가족 여행으로 2년 만에 다시 제주에 왔다. 원래는 삿포로를 계획했는데 근래에 지진이 너무 잦아져서 말이지. 큰일이야 있겠냐만 태생부터 쫄보라 어쩔 수 없다. 급박한 일정 변경으로 비행기표가 있으려나 싶었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초대박 특가라니. 렌터카보다 싼 항공권을 예약하며 고작 이 표로 비행기가 뜰지 잠시 의심하였... 어쨌든 잘 된 건 잘 된 거지. 데헷.




900%EF%BC%BF20250609%EF%BC%BF094512.jpg?type=w1 아름다웠던 Y리조트




산방산 자락의 아름다운 숙소를 지나 후반전 2박 장소는 이곳 신화월드 리조트다. 재작년에도 왔었지. 다른 이유는 없다. 물개 유전자를 가진 아들이 좋아하는 워터파크가 여기에 존재할 뿐. 노곤한 몸과 마음을 접은 채 반강제로 이끌려 왔지만, 기왕지사 발을 담갔으니 자발적으로 물 만난 생쥐가 되기로 한다. (힘... 힘이 달린다...)



녀석의 페이버릿은 꿀렁 파도풀도 아니고 스릴 넘치는 워터슬라이드도 아닌, 유수풀이다. 흐를 유(流), 물 수(水). 말 그대로 물이 흘러가는 수영장 되시겠다. 동력 장치가 물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고, 사람들은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물이 빠르게 흐르기에 가만히만 있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튜브 하나를 부여잡고 어화둥둥 부유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은 천국인가, 워터파크인가.



유수풀을 돌며 문득 상념에 빠진다. 물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나도 흘러간다. 한쪽 방향으로 가는 건 물이나, 시간이나, 인생이나 매한가지.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유수풀에 몸을 맡긴 아이(=나)가 느꼈던 편안함은 분명 이런 '자연스러움'에서 나왔을 테다.



요즘 내 삶이 그렇다. 고민이라는 걸 최대한 하지 않고 있다. 생각 없이 산다는 뜻보다는, 이런저런 일에 특별히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해 보인다. 출근해 일하고,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미래를 위해 목표를 정하고 쉼 없이 달려왔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뭔가 걱정을 내려놓았다고나 할까.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른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인생의 자연스러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성공을 위해 앞을 보며 달려가는 것일까,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일까. 답이 없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겠지.



여행자의 시간은 조금 더 빠르게 흐른다. 오늘 날씨는 무척 꾸물꾸물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린다. 어제 아이가 한라산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 가 봐야 흐릿한 구름층만 볼 것 같다. 그래도 뭐... 가고 싶다니 근처에라도 다녀올까.



900%EF%BC%BF20250608%EF%BC%BF145202.jpg?type=w1 구름 모자를 쓴 산방산(feat. 유람선)




내비게이션에 '1100고지'를 찍고 핸들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편의점을 등지고 한라산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상 부근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짧게 조성된 탐방로 데크길을 한 바퀴 돌았다. 초록초록한 제주의 여름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화산석 위에 핀 지의류, 습지에 발을 담근 소금쟁이와 두꺼비,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니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해진다.




900%EF%BC%BF20250610%EF%BC%BF165310.jpg?type=w1 백록담은 어디인가




둥그런 데크길이 끝나간다. 출발 지점이 저 앞에 보이는데 갑자기 눈이 부시다. 이럴 수가. 구름 사이사이를 비집고 태양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우리 오늘 한라산 볼 수 있는 거야?



"뭐 해 아빠. 뛰어야지!"





900%EF%BC%BF1749562287311.jpg?type=w1 한라산 파노라마




'자연'스러움이 주는 선물이 이런 걸까.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 산 너머 산이 우리를 반긴다. 다시 한번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편의점 옥상에 올라 한라산의 옆태를 눈에 담는다. 어라, 여기 망원경도 있잖아.



"아들, 저기 백록담 계단에서 내려오는 사람 보인다!"


"와, 진짜네. 아빠. 다음에는 우리 꼭 백록담 보러 오자."


"응? 어어. 그르자. ... 근데 그때는 너 친구들이랑 가야지."


"싫은데? 난 아빠랑 갈 건데?"


"응? 어어... 그르자. ㅎㅎ"






물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인생도 흐른다.



모든 날이 같을 순 없겠지만, 가끔은 내 삶도 유수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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