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온전히 읽는다는 것
은 어렵다. 나는 병렬독서를 한다.(이런 습관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만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늘어지게 읽는 줄 알았다.) 따라서 사실 부끄럽지만, 온전히 책을 다 읽기가 힘들었다. 이것저것 늘어진 책들만 보면서 올해부터 결심한 것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최대한 한 권의 얇은 책을 그곳에서 다 읽고 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책을 온전히 다 읽는 연습이 되면 두꺼운 책도 온전히 다 읽으리라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그림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 신해경 옮김>을 2시간 정도 소요하여 읽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편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그들이 미술에 대하여 생각을 담고 있다.
어떤 글귀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음. 그치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도 그들의 옆에서 공감을 하기도 했다. 마치 카페에서 나는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부자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 청자의 입장으로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특히 이 말들이 와닿았다.
"촉감과 회화 기술 간의 관계를 물으셨죠? 저는 웃으면서도 덜덜 떨리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게 저에게 아주 핵심적인 질문이기 때문이에요. 화가로서 제가 품은 모든 질문의 기저에 놓인 질문이거든요.
그러니 저는 회화란 보이게 만들어진 촉감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다른 도구와 마찬가지로 붓은 팔과 손의 연장이에요. 그 안으로 뻗은 신경은 없지만, 쓰는 데 익숙해지면 붓털과 캔버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극도로 정밀하게 느낄 수 있지요."
"두 번째 이유는 사진 이미지의 성질이 그림 이미지의 성질과 다르기 때문이었어요. 복제화를 볼 때 우리는 진품'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즉 존재감을 지닌, 또는 아버지의 친구분이신 발터 베냐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라를 지닌, 유일하고 고유한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는 거죠. 지금 우리는 아주 다른 위치에 있어요. 더는 존재하지 않는, 혹은 최종 그림의 '표면 아래에'만 있는 이미지를 찍은 사진을 보니까요. 이 사진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척해요."
나는 이것이 현대의 우리가 지구반대편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를 인터넷에서 손쉽게 볼 수 있으면서도 꾸역꾸역 프랑스로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가는 이유이며, 우리가 아무리 AI에게 모든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겁을 먹어도 모든 일자리를 빼앗기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사진기가 나왔을 때, 모든 화가들이 걱정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표현의 방식,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양화되고, 편리해졌다. 이후에 모든 화가가 굶어 죽지 않고, 화가는 화가의 삶을, 사진작가는 또 그들의 삶을 살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