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11월 생존일지 4탄
일주일 내내 비가 오며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태양이 그저 고맙고
3-4시면 벌써 어둑어둑해지는 영국의 11월
영국인들은 으스스한 11월을 대체 어떻게 보내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두개의 커다란 축제가 영국인들의 11월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1. 리멤버런스 데이 Remembrance Day (11월 11일)
이 날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을 기념하여 희생을 애도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함께하는 날이다.
사실상 11월 내내 리멤버런스 데이를 기념하는 양귀비 모양의 장식들을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1월 내내 리멤버런스의 달인 듯 하다.
11월 첫째주 아이 학교 채플시간에는 1차 2차 세계대전 희생자이자 졸업생들을 애도하는 예배가 있었다.
유치부 아이들은 모두 가슴에 양귀비를 달고 앉아 있었고
원래 희생자 이름은 교회 벽에 새겨져 있는데 이날은 특별히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고 긴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어린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희생자들이 죽음 앞에서 겪었을 극도의 두려움과 그 소식을 접한 가족들의 충격과 절망감이 전해지는 듯했다. 또한 휴전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희생자들도 함께 떠올랐다.
오늘따라 오르간 반주 소리가 더 애절하게 들렸다.
채플이 끝나고 나서도 애잔한 여운이 계속 남아 추모식에 참여 후 집에서 색종이로 양귀비를 만들어 걸어 두었다.
Oxford Magazine이라는 사이트에서는 옥스포드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를 매달 알려주는데 걸어서 5분도 채 안걸리는 St Giles church 앞에서 단체 추모 예배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https://theoxfordmagazine.com/event/oxford-city-remembrance-sunday-service/
한국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대규모 추모식이었다. 빨간색 드레스, 빨간색 머플러, 빨간색 바지나 치마를 입고 (트렌디한 수트 차림에 유니온잭 양말을 신은 아기 아빠의 패션이 이날의 베스트 드레서) 밖으로 나온 영국인들. 마침 지난 번 친구에게 선물받은 빨간색 모자를 꺼내 쓰고 살포시 무리 안에 들어가 리멤버런스 데이 지역 행사에 참여했다.
브릿센트라는 원어민 영국영어 화상수업을 주 1회 하고 있는데 담당 튜터 헬레나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영국인들에게는 1차 세계 대전 전쟁에서 단기간에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그들의 죽음의 과정 또한 2차 세계대전의 공중전과 달리 1차 세계 대전은 총기, 독가스 등에 의해 더 잔혹한 방식으로 희생되었기에 영국인들은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아픔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출신국가와 종교는 다르지만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참 예쁘다.(내 앞에 서계셨던 할머니의 옥구슬같던 목소리) 만나서 반갑다. 등등 이야기를 나누며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으며 끝이 났다.
깨알정보:
리멤버런스 데이에 포피 POPPY 양귀비 꽃을 장식하는 이유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전사자들로 가득한 전장에서 양귀비를 보았다는 유명한 시 (In Flanders Frields, 플란드르 전장에서) 에서 이 꽃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2. 본 파이어 나이트 데이 Bon Fire Night Day (11월 5일)
11월 첫째주부터 셋째주까지 밤이면 밤마다 번개소리가 찾아온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밤시간 내내 요란하게 울려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가 참여한 이후로 그 불꽃 놀이 행사에 참여한 이후로는 밤마다 들리는 굉음 소리에 무덤덤해졌다. 아들도 오늘도 불꽃놀이 하나봐~
원래 본 파이어 나이트 데이는 모닥불을 피워 인형을 태우는 행사였다고 하지만
아들과 참여한 사우스 파크 본 파이어 페스티벌은 살짝 변형된 형태로 불꽃놀이와 야외 스트릿 푸드 즐기는 기부 행사였다.
이 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605년 11월 5일 가톨릭 신자였던 가이 폭스라는 사람이 개신교 국가가 된 정부에 반하여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되기를 바라며 제임스 1세와 의원들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런던 국회 지하실에 화약통 36개를 넣어 대규모 폭발을 준비했다고 한다. 음모에 함께 가담한 사람 중 한명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들통나 결국 발각되고 가이 폭스는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이 행사의 기원을 제대로 잘 모르는 영국인들도 많다고 하니 아마도 불꽃놀이의 밤 자체를 즐기는 날인듯 하다. 놀라운 것은 1차,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중 국민의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 이 축제가 전쟁 중에는 불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도 실내에서 축제를 이어갔다는 것! 이 축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불꽃놀이 행사 중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는 아이들의 뉴스를 보고서 아들과 나란히 챙이 큰 모자 세트를 쓰고 사우스 파크 공원으로 나섰다. 한국에서 봤던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와 스케일의 현란한 불꽃놀이를 예상했었는데 너무나 아기자기한 소규모의 불꽃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과 맥주, 핫도그와 감자튀김을 손에 들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행복해하는 영국인들을 보니 어쩌면 거창하지 않은 소소한 축제에도 충분히 기쁨을 느끼는 도파민 자극에 덜 예민한 영국인들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된다.
아이의 말에 의하면 친구들도 CPR 교육에 열광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 나라는 재밌는게 별로 없으니 별것에 다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유행에 좀 뒤쳐진 듯 하다고도;;;)
11월의 영국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싶었다. 그저 바라보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들의 숨결과 삶의 결을 함께 느끼는 존재로서 그들과 시간을 나누고자 했다. 값비싼 여행지나 호텔이 주는 화려함보다, 이 짧은 순간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스며드는 경험은 훨씬 더 큰 울림을 남긴다. 어쩌면 동네 앞 길거리에서, 공원에서 느낀 이 찰나의 감동들이 영국에서 보낸 1년 중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