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는 용기와 발걸음
나 중대발표할 거 있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족 송년회 자리를 빌려, 지독한 독감에 걸린 나를 조금이라도 더 가엽게 여길 이 타이밍에,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무섭고 두렵지만 입을 떼었다.
"4월에 여행 갈건데, 이미 비행기는 끊어놨고... 편도로... 시베리아횡단열차..."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짧게 전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빠 엄마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갔다. 표정이 어떨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틀에 갇혀 공부밖에 몰랐던 범생이과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사람을 만나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불행히도 모든 학생 시절을 통틀어 공부 외에는 별다른 추억이 없다. 그런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꿈이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는 것-
질풍노도의 시기 (소위 중2병이라 말하는) 열다섯에 스프링 노트 하날 꺼내어 중간 어귀쯤 편 다음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 제목을 크게 쓰고 1부터 35까지 숫자를 적어내려 갔다.
1. 세계여행
세계여행이라- 왠지 모르게 내 입으로 말하기 낯간지러운 버킷리스트였다. 남몰래 자유를 갈망하고 언젠간 이 틀을 깨고 나가리라 다짐했다. 고작 중학생이었다. 그로부터 딱 10년 후, 스물다섯 이제야 꿈을 이룰 수 있는 돈과 시간과 용기가 생겼다.
숨겨왔던 나의 꿈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반대할 것 같았지만 설득할 각오는 준비되어있었다. 그동안 일주일에 2-3개씩 아르바이트 해 돈을 악착같이 모았던 나의 노력을 부모님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철부지 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 아빠는 너를 믿어. 하고 싶은 것 좀 한다고 문제 되지 않아. 취업하면 길게 여행 다니긴 힘드니 이번에 한번 다녀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쁜 길로만 빠지지 말고, 결국 돌아오면 가족뿐이야!"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두운 조명 덕분에 엄마 아빤 내가 울고 있는지 몰랐나 보다. 그러다 닭똥같이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수습하다가 딱 걸렸다. 엄마 아빠가 당황한 듯 "너 왜 울어?" 하시는데
"ㄱ...고마워서..."
정말 그냥 고마워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의견을 존중해주고 믿어줘서 감사하다. 당연히 반대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야 저렴하게 유럽에 갈 수 있단 생각과 기차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만으로 4월에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행 편도 티켓을 끊은 것. 이게 내 모든 여행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갈지, 어디를 갈지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언제 돌아와?”라고 물었을 때 “나도 몰라”라고 멋쩍게 대답하곤 했다. (기약 없는 세계여행을 한다고 말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부끄러웠나 보다) 막연했던 것들이 구체적인 모양새를 띠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넌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울타리를 만들고 단정지은 건 나다. 그러기에 그 틀을 깨고 나오는 것도 내 몫이다.
이제는 비로소 ‘난 이렇게 살아도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이건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이 된) 나의 4년 전 여행 이야기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밝게 빛나던 시절, 나는 다시 한번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