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칠 수 없는 그

by 충만의 수

한 달을 넘게 내 구역의 후속 주자를 기다렸다. 두 달째로 접어드는 마지막 날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일한다고 나선 사람이 왔다는 것이다.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생겼는데, 카드빚을 내가면서 해결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알바였다. 솔직히 말하면 씀씀이가 헤퍼진 가계 운영에 잠깐 기름칠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돈이고 뭐고 잠이나 푹 자고 싶어졌다. 사장님께는 지병인 당뇨를 핑계 삼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알바까지 하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어 가족들이 다 말리고 있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그만둔다고 말했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는 문제없이 손쉽게 된 것 같은데….


<인수자에게 보낸 문자이다. >

제가 일하는 패턴이니 참고하세요.

주말에 한번 코스대로 돌아보세요~

구분 박스나 가방 3~4개 준비 추천!!


① 외곽도로에서 좌회전해서 들어와서

② 우남콤비 102동 지하에 들어가기(우유가 있어요)

③ 부동산, 101동 805호, 1405호, 102동 우유를 챙겨서 먼저 돌리기

※ 되돌아와서 콤비 104~106동 / 103동, 101동 1912호 등 뒷자리/제일오뚜/동아

(이렇게 구분해서 담으면 편해요)

④ 차에 싣고 104동 쪽으로 이동. 걸어서 104~106동 돌리기

⑤ 103동 쪽으로 차 갖고 와서 주차하고, 103동, 101동 두 자리 호수 돌리기

⑥ 제일 오뚜 있는 갓길로 가서 주차

⑦ 904동부터 쭉 돌리기

⑧ 동아1차로 이동. 제일 안쪽에 있는 101동 앞에 주차하고 101동 돌리기

⑨ 차 갖고 103동 앞에 주차 후 103동 돌리고

⑩ 105동으로 이동. 104~105동 돌리기

⑪ 109동으로 이동. 107~109동 돌리기

⑫ 동아 1차에서 동아 2차로 이동

⑬ 203동 앞에 주차. 201~203동 돌리기

⑭ 차로 204동으로 이동하여 304호 돌리기(잠깐이니 시동 켜 놓고 다녀와도 돼요)

⑮ 배달 완료. 수고하셨습니다~



한 달 넘게 내 구역의 후속 주자를 기다렸다. 두 달째로 접어드는 마지막 날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일한다고 나선 사람이 왔다는 것이다.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생겼는데, 카드빚까지 내가며 해결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알바였다. 솔직히 말하면 씀씀이가 헤퍼진 가계 운영에 잠깐 기름칠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돈이고 뭐고 잠이나 푹 자고 싶어졌다. 사장님께는 지병인 당뇨를 핑계 삼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알바까지 하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어 가족들이 다 말리고 있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그만둔다고 말했다.

내 앞전 사람은 2일 만에 연락이 왔다고 했는데...


막상 새로운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걱정이 앞섰다. 기다림 끝에 온 새로운 배달맨이 일이 어렵다며 식겁하고 그만둔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 실체화한 것이 바로 위의 노선도이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그리기 시작한 노선도는 1시간에 걸쳐 완성됐다. 뚝딱 쓱싹거리기만 하면 완성될 줄 알았는데, 기억을 종이로 꺼내오고, 글로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날 퇴근 후 딸에게 직접 그린 노선도를 "짠"하고 보여줬더니 "이걸 엄마가 그렸어!"라며 감탄하는데, 어깨가 으쓱했다. 애들이 장난으로 그린 그림과 별반 다를진 모르지만, 실력 있는 설계자의 캐드 디자인에 쏟은 정성만큼 버금간다고 자부한다. 그만큼 그리는 과정이 쉽진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필로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중 종이가 찢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잘 넘기고 완성한 나의 노고가 갸륵했다.

열심히 완성한 그림을 후배 배달맨에게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멋지네요. 인수인계가 완벽해요^^"


이만하면 마음을 사로잡은 듯하다. 그만둔다는 소리는 안 할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주말이 끝나간다. 몇 시간 뒤면 인수인계를 위한 마지막 배달만 남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알람을 확인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혼자 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역시 혼신을 담은 노선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오지랖일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그림에 대한 깊이 있는 피드백을 요구하진 못했다. 안 할 것이다.

2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우유 배달 사장님이나 새로운 배달맨으로부터 하소연하는 전화나 문자는 없다. 순조롭게 일이 잘되어 간다는 뜻이다.


알람 리스트는 간소화되었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 덕에 이른 아침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딸이 잠자리 인사를 할 때, 엄마가 일하러 안 가서 좋다는 말을 지금도 하곤 한다. 딸도 엄마와 함께 마음으로 배달을 다녔더랬다.


이렇게 세 사람의 밤은 각자의 편안함 속에 달콤하고 깊어갔다.


#새벽알바_우유배달 #인수인계자의 배려 #감동의_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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