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 앤 넌센스 (케빈 랠런드 길리언, 길리언 브라운)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정신 속에는 세계를 인식하는데 기여하는 어떤 전제조건이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라고 주장했다. 이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맹위를 떨쳤던 연합주의로 불리우는 영국 철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견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진화론자들에게는 학습을 위한 생물학적 조건이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내재 되어 있으므로 결국은 문화는 이같은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을 주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반대로 이 주장은 결국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주장의 근거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동물은 현재와 같은 문명(문화)를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생기는 또하나의 반론은 이런 식이면 "학습"이란게, 즉 교육이 필요없지 않느냐는 거다. 알아서 다 이룰거 이룰테니.
진화론의 주요 일파인 사회 생물학의 대표자인 윌슨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사회조직은 자연선택의 역사를 반영한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논리는 저자들도 잘 지적하듯 "현재의 사회 상태가 어떤 면에서는 최적일 수 있다." 라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사실 이 같은 "결론"은 진화론자들로선 가장 언급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어떻해서든지 넘어서야만 하는 벽이다. 이런 논리가 결국 우생학을 만들었거나, 옹호했고, 이는 결국 유태인 대학살이이라는 제노사이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도 이같은 우생학적 논리에 근거한 인종 차별은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진화심리학의 스타 리차드 도킨스는 "진화된 경향은 불가피하며 근절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한다면서 사회생물학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또한 좀 어색한 얘기로 들린다. 이기적 유전자가 알아서 찾은 최적의 결론이 왜 바뀌어야만 하는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심리적 유전자는 "이기적이지 않은" 유전자가 될텐데. 물론 이 책에선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 이같은 반론에 대해서 도킨스는 준비가 되있다. "큰 범주에서, 그리고 넓은 범위에서 결국 조화로운 사회를 조성하는게 당장은 내게 도움이 안되더라도, 결국엔 그 구성원인 인간에게 유리하게될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인 선택" 이라고 맞 받아 친다. 이쯤되면 그 이기적 유전자는 메타인지가 가능한 신적 레벨에 이른다.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설계자" 가 되는 거다. 수긍이 어렵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진화된 심리적 매커니즘(EPM) 의 대표적인 예로 계부의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많다는 사례를 내세운다. 그런데 이건 상식이지 않을까? 당연히 친부의 가정 보다 계부의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내 친 자식이 아닌데. 혈연을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을 진화 심리학자들은 "내 새끼가 아닌 걸 키워 줬더니만 결국 나한테 도움이 안됐다" 라는 심리적 피해감이 유전되면서, 의붓자식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는 논리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렇듯 유전된 심리적 매커니즘이 의붓자식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이 지점에서 또 다음과 같은 반발감 생긴다. 그렇다면 의붓자식을 나름 잘 키운 계부들에겐 어째서 이같은 "혐오감"이 유전되지 않은 것일까? 이들에겐 학대보다는 잘 키워주는 쪽이 결과적으로 내게 이익이 됐다는 심리적 메카니즘이 유전돼서 일까? 도대체 자연은 그럼 왜 어떤 인간들에겐 혐오를 유전시키고, 같은 상황에 대해서 어떤 이들에겐 "계산적 선대" 를 유전시킨 것일까? 결론은 최소한 계부학대를 EPM의 증거로 내세우는 건 빈약한 논리라는 거다. 그럼에도 이 빈약한 논리를 내세울 수 밖에 없는 게 진화심리학의 한계고. 이러니저자들이 소개하듯이 진화 심리학이 인간사회생물확과 마찬가지로, 그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런 이야기들"류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비난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내가 좋아하고 인정하는 지식인인 유시민 작가가 왜 그토록 리차드 도킨스에게 빠져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또 하나의 진화론 학파인 문화진화론자들은 "하나의 문화형질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채택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유전적 성향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는 '지역문화가 무엇인가?' 또는 '문화 전달자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는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저자는 문화진화론의 대안으로 등장한 가장 최근의 진화론 학파인 "유전자-문화공진화론"을 소개한다. 문화진화론이 진화론으로 보기엔 실제론 사회과학인 문화결정론에 가깝게 보일 수 밖엔 없었던 게 진화론자들로선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에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이 등장하여, 유전자와 문화는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한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낙농업이 발전하고 나서 성인의 젖당 소화능력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낙농업이 발전한 지역의 성인들의 경우 젖당 능력이 90%인 반면에, 일반적인 성인들의 경우 젖당 소화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비율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다양한 집단들을 대상으로 수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낙농업 발전 시기와 젖당 흡수 유전자의 전파 시기를 계산해 본 결과, 낙농업이 먼저 진화한 뒤, 젖당 흡수 능력이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주장일 뿐이지 객관적인 토대가 없다. 낙농업이 성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성인들을 대상을 젖당 소화능력을 검사해 본 사례가 있었을까? 아마 그런 검사 능력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그 지역 사람들은 우유 먹고 탈난 사람들의 사례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적었다는 정도? 달리 보자면 젖당 소화가 상대적으로 잘되는 사람들이 낙농업을 발전 시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이들의 견해를 일부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 건 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태어났다는 것과,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건 아닌데,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가 인간을 그렇게 되도록 진화시켰다는 논리는 해석의 문제라고 보인다.
적응을 자연의 선택이라고 보는 견해와 사람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타고 났다. 만들어졌다. 혹은 창조되었다 라고 주장하는 견해는 어느 쪽이 맞을까? 진화론자들은 진화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지금의 해석들이 나름 개연성을 확보할 테니까. 그런데 문화는 어떨까? 문화의 변화 속도는 현대에 들어설수록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같은 속도의 문화 변동에 적응하며 살고 있다. 이 빠른 적응도 자연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민자들을 낙농업 환경에 거주하게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죽을때까지 아니 그 손자들 까지도 유당 소화능력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이뤄지려면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도 "여기서 살아가려면 유당 분해의 신체로 변화해야해." 라는 심리적 각인을 지시하고, 이를 자손을 통해서 유전시키려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엔 없다. 그럼 이 이주민들은 넘쳐나는 우유를 오로지 판매만을 위해서 뽑아낼 것인가? 소화가 안되니 비싼돈 주고 라토프리 가공을 해서 남는 유제품을 소화할 것인가? 그렇게 하다간 망할텐데. 아마도 최소한 2세대 선에선 젖당 소화능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까지도 소화가 안되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던가. 이 부분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책엔 나오지 않은.
그런데 재미있는 건, 최근엔 느린 진화속도의 벽을 의식한 탓인지 진화론계에서 "생물의 진화는 극단적으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으며, 심지어 몇 세대 만에 중요한 유전형 및 표현현의 변화가 관찰되는 경우도 있다." 는 주장을 저자들은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을 어떤 반론이든지 다 커버가능한 omnipotent 로 끌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옴니포텐트, 한국말로 전지전능. 그야말로 진화론이 이젠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들은 대표적인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자인 에릭 올든 스미스의 견해를 소개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유전 가능한 정보가 심리적 매카니즘을 구축하고, 이렇게 구축된 심리적 매커니즘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여 행동반응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적합성 효과가 나타난다. 생물학자들은 물론, 진화론에 관심이 많은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대부분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재미있는 건 스미스 이 발언은 진화 심리학의 적합성을 강변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화론을 미덥지 않아 하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최소한 이 정도는 동의 할 수 있지 않는가?' 라면서 제기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을 위시로 한 진화론자들의 담론이 얼만나 신뢰할만 한가를 떠나서 일단 유물론자들이라면 이같은 입장을 견지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제시한 것이라고나 할까? 진화론계 내부의 사정이 어떻든간에 유물론자들의 입장에서 진화론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정의함에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생물학적(과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케빈과 길리언은 이 책에서 현대 진화론의 대표적인 5가지 학설(인간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공진화론)을 소개하고, 아울러 각각에 대한 비판 역시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5가지 학설을 비판의 입장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융합한다면 보다 정확한 인간행동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결론을 내린다. 특정 학설에 대한 지지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이 두사람 역시 다윈의 후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미스의 요약에 수긍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특히 "인간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인격을 따라 창조되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인간과 문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달리 거부할 만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최소한 지식인이라면 다소(?) 비약으로 보일지언정 그래도 뭔가 입장이란 걸 가지고 있어야만 할테니까. 모든 게 우연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 만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같은 담론에 대해서 "인간은 주어진 타고난 지능과, 빠른 적응이 가능한 신체구조 덕택에, 지금까지 환경에 적응하며 문화를 이루고 또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 이같은 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 오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동물로 불 수도 있겠지만, 동물이 아닌 '인간'인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진화론자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과학의 영역이 아닌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반박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