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

해변의 카프카 - 무라카미 하루키

by 트로이의 연인


화면 캡처 2025-08-08 185507.png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일인으로서 아직까지 해변의 카프카를 읽지 않았다는 하루키 팬으로서의 멋쩍음과 숙제를 끝내지 못한 듯한 불편함으로 여름이 가기 전에 "해변의 카프카" 읽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고,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해변의 카프카"라는 여름 독서 여행을 마쳤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든 생각은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하루키 최고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리고 "기사 단장 죽이기" 3부작이란 사실엔 변화가 없다라는 점이었다. 안타깝지만 뉴욕 타임스 20세기 100권의 소설에 포함됐음에도, "해변의 카프카"는 최소한 나의 하루키 최고 3작품 목록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생각해 볼 구석이 적지 않은 좋은 소설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특히 하루키 작품의 대부분이 중년 남성을 화자로 세웠다는 점에서, 15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간 점은 하루키의 작품 연대기에서 보자면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하루키 본인이 한국판 출판에 부쳐서 15살 소년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그 나이 때는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이며, 정신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고, 미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이라고 할 라이프 스타일 같은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원틀이라는 점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 본인의 설명에 충분히 수긍이 가면서도,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의 연령을 질풍노도의 시기의 청소년이라고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20, 30대의 청년일 수도 있고, 이 작품을 집필하던 하루키의 나이때인 중년 남성일 수도 있다. 더 이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고통받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만 제외하면 청년세대나 심지어 중년 세대, 심지어는 장년세대 조차도 여전히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쉴 남성들이 적지 않을테니까.


남자 아이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누구나 한 번 쯤은 통과해야만 할 법한 통과의례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의 벗은 몸을 보고 당황했던 초등학교 4학년의 시절이 떠오른다. 이후로 내 꿈 속에 어머니의 벗은 몸이 여러차례 등장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질투의 대상이라든지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냥 언제나 내겐 아버지 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여성으로 인식한다면 결국 아버지는 경쟁의 대상이고, 둘 중하는 포기하거나 없어여먄 할 존재가 된다.


그런데 다무라의 아버지는 조금 특이한 사람인 듯 하다. 자식이 미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접어들기도 전에 이미 "치정" 을 예상하고,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나를 죽이고, 어머니와 그리고 누나와도 성관계를 가질 것이다." 라고.


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련 짓지 않더라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오늘날 "아버지 없는 세대"의 아버지들을 그리고 있는 듯 느껴졌다. 어른 없는 세대의 어른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고. 자식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건 아예 옵션에도 없고, 자기 아들 조차 자신의 이익을 빼았는 경쟁의 상대로 보는 아버지, 그리고 어른의 존재. 이같은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 어른 같지 않은 어른으로부터 어린 다무라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일 뿐이었을 거다. 맞서 싸우기엔 너무나도 큰 벽이니까.


흥미진진한 건 하루키는 주인공 다무라에게 아버지라는 과제를 선물했음에도 이야기는 다무라와 어쩌면 다무라의 숙적이 아니라, 나카타라는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나카타 할아버지는 뭐랄까, 하루키가 고통받는 가여운 젊은 영혼인 다무라에게 보낸 선물 같은 존재다. 다무라 대신 다무라의 아버지를 죽여줬으니까. 감히 덤 빌 수도 없고, 현실 가능성도 없는 친부살해라는 금기를 나카타라는 타자를 통해서 이뤄준다.


그럼 이제 다무라는 편해 질 수 있을까? 어머니를 여성으로 인지한 원죄의식으로부터 그리고 혹시 자기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 라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더라도, 순수한 젊은 영혼은 끊임없는 죄책감과 자기비하에 시달린다.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다무라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죄책감과 자기 비하로 다가온다. 그래서 다무라가 그랬듯이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실제로 가출을 하든, 마음의 가출을 저지르든 간에. 도피는 도피다.


아무리 제대로 된 아버지이자 어른인 나카타가 가장 큰 짐을 덜어줬다고 해도 (부친 살해), 결국 도피처로부터 돌아와서 삶이라는 파도를 마주해야 하는 결정은 본인의 몫이다. 호시노가 나카타 할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입구를 닫는 일" 을 수행했던 것 처럼, 죄책감과 자기비하 그리고 두려움이란 세상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오는 건, 오롯이 다무라 카프카 본인의 몫이란 얘기다.


다행히, 다무라는 나카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바램으로, 비현실의 숲으로부터 돌아와 현실을 마주하기로 용기를 낸다. 해피 엔딩이다. 그렇지만 이 해피엔딩은 돌아옴 그 자체로 완성될 수가 없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현실로 돌아온 다무라는 자기 자신에게 얘기한다. "나는 아직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어." 라고.


하루키는 이 젊은 영혼에게, 그리고 세상의 수 많은 다무라에게, 답한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거야. 너에겐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덧붙인다.

수고했으니 이젠 좀 쉬라고.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


나도 내 아들에게 그리고 세상의 다무라들에게 그들의 나카타가 되어 주고 싶다는 바램이 생긴다. 그리고 그들을 격려하고, 좀 쉬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이 나이임에도 누군가 나한테 어른이 되어 줬으면, 그리고 "넌 할 수 있어. 좀 쉬어." 라고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부끄러운 바램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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