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목축임이었던 빗방울은 어느 누군가에겐 범람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며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생각
2018년 5월.
어쩌다보니 정확히 7년 전이다. 지금과 다른 점은 그 때의 나는 20대 중반이었고,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사회초년생이었고, 새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한 때였고,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으며 나쁘게 말하면 부끄러울 만큼 책을 읽지 않았던 때다.
2025년 5월.
마음만은 20대 중반이지만 주민등록상 나이는 30대가 되었고 7년 다닌 회사에서 퇴사까지 해버렸고, 그 때의 남자친구는 지금 남편이 되었으며 좋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약간은 성숙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속세의 때가 좀 묻었다.
7년 전 영화관에서 남자친구와 <버닝>을 본 뒤 너나할것 없이 혹평을 서슴지 않았던 기억이 또렷하다. 기대했던 네임드 감독의 영화라는 점, 칸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점, 미스터리라는 장르, 청불영화라는 것도 은근히 그 기대감에 한 몫했다. 기억나는 것은 되게 느린 전개와 난해한 스토리였다는 것. 유아인이 맡은 종수는 전종서가 맡은 해미의 집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해미는 종수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4차원의 말들을 하고 마지막은 뜬금없이 살인이 일어난다는 것 정도로 기억했다. 그래서 이상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당시 40대 중반의 회사선배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재미없었다는 나의 평에 ‘아직 어려서 그래’라고 말했던 그분. 패기 넘치던 20대 중반의 나는 ‘취향차이 같은데~’ 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던 중 최근 어느 댓글에서 영화 일부 대사를 봤다.
“저기 끝없는 모래 지평선에 노을이 지는 거야.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피같 은 붉은 색이었다가가 그러면서 보라색 남색이었다가 그러면서 점점 더 어두워지면서 노을이 사라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거야. 아. 내가 세상의 끝에 왔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 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예 사라질 수 있으면 좋겠다.”
갑자기 그 회사선배의 말이 생각났고 지금 보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를 본 뒤 남편에게 신이 나서 영화 줄거리와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영화보다는 한 편의 책을 본 것 같고, 소설보다는 시에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책을 보면서 가슴을 울리는 문장에 밑줄을 치는 것처럼 영화 대사 하나하나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와닿는 게 많았다. 종수는 소설을 쓰는 작가지망생이고, 마트 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생활한다. 해미 역시 하루 벌어 하루 쓰는 하루살이 같은.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 해미 앞에서 종수는 글을 쓴다며 허세를 부리고 멋있다는 해미의 말에 우쭐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해미는 판토마임을 배운다며 종수에게 귤을 까먹는 흉내를 한다.
"봐봐.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잘하네 재능있네."
"이건 재능으로 하는게 아니야.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사실 종수와 해미의 삶은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삶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뭣도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사는 삶’에 가깝다. 소설가가 될 희망? 가능성?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할 거라는 기대나 꿈? 현실?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아도 간절하게 또 열렬히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해미가 이야기한 아프리카 부시맨 중 그레이트 헝거가 이들과 가깝다.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지 그런거를 늘 알려고 하는 사람. 삶이 무겁고 버겁다.
해미와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종수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를 위해 공항으로 마중가지만 해미는 벤이라는 어떤 남성과 함께 돌아온다. 30대 중반에, 하는 일은 노는 것이라는데 비싼 외제차를 모는 강남의 넓은 집에 사는 남자. 벤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종수와 해미의 청춘로맨스로 끝날 수 있던 영화였을까?
벤은 종수와 달리 전부 쉽다. 해미 앞에서 소설을 쓴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던 종수는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부끄러워진다. 종수에겐 하나하나 의미있던 해미의 작은 행동과 말도 벤에겐 쉽다. 벤과 그의 친구들에게 해미는 재밌는 거리다.
종수의 시골집(종수와 해미가 어릴 적 함께 자란 동네의 시골집)에서 셋은 대마초를 피운다. 벤이 준 것. 종수의 아빠는 분노조절장애라서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중이다. 벤은 쉽게 대마초를 피우고 경찰들은 이런 거에 관심 없어서 걸릴 일 없다고 말한다. 역시 그에게는 범법도 쉽다. 종수의 아빠 재판도 판사와 변호사에게 상당히 시시하고 허술하게 묘사된다. 탄원서를 작성하는 간절한 종수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종수는 벤에게 어렸을 적 엄마가 집을 나갔고 아빠가 시켜서 엄마의 옷을 태웠다. 그 순간은 종수에게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처럼 새겨졌을 것이다. 종수의 얘기를 듣고 벤은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했다.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거죠. 더이상 쓸모가 없어 버려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비닐하우스.”
모든 게 쉬운 그가 더 큰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는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일까. 그가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는 없고 해미는 사라진 채 해미의 시계는 그의 집 화장실에 있다. 다른 수많은 시계들과 같이 섞여서. 그에게 해미는 희열을 느끼기 위해 태우는 쓸모없고 버려진 비닐하우스였다.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가 찾아간 밴의 집에서 고양이를 보게 된다. 해미의 고양이었던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한다. 해미의 집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데 해미는 밥을 주라고 했고 종수는 해미가 고양이 역시 ‘없다는 것을 잊은 것’이라 생각하고. 이와 비슷한 것으로 해미가 어렸을 적 빠졌다는 우물 역시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다. 믿는 만큼 보이고 믿지 않는 순간 없는 것이다.
리뷰에 대한 소제목을 한문장으로 적어보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고 사람들마다 각자 크게 와닿는 것이 모두 다를 것이다. 그 중 나에게 가장 컸던 부분을 생각하며 적어보면,
“누군가에게 목축임이었던 빗방울은 어느 누군가에겐 범람이었다”
누군가에게 간절했던 것이 다른 이에겐 너무 쉬웠고, 누군가에게 희열이었던 것이 다른 이에겐 절망이기도 했다.
40대의 내가 다시 보게될 버닝은 어떤 버닝일까.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읽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다른 울림을 주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7년 뒤 나에게 어떤 울림을 줄지 기대하게 된다. 그 동안 내 기억에 없었던 것은 7년간 내가 재미없다고 믿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