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매트릭스를 곁들인...
*정답에는 관심 없는 초보자의 시선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생각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미키17….
내가 어렸을 때 개봉했던 봉준호 영화들을 요즘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가 명작들을 어렸을 때 봤거나 아직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 마치 아직 뜯지 않은 새 사탕이 있는 것처럼. 최근에 영화관에서 미키17을 보고 설국열차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 마더, 기생충처럼 누구나 다 극찬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 미키17에 대한 평은 주로 옥자, 설국열차와 묶여 혹평을 받았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외국 배우가 출연한다는 점, 현실사회가 아닌 감독이 설정한 어느 한 시점의 미래라는 점, 관객의 양심이나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을 꼬집어서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이유 때문에 주로 평이 갈린다고 생각된다. 특히 옥자는 환경단체나 채식주의자에 평소 반감을 가진 자라면 더욱 불편했을지도. 환경단체도 채식주의자도 아니지만 나는 재밌게 봤고, 평론가가 아닌 관객인 나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경외심을 느꼈고, 한참을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는 것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설국열차는 언뜻 보면 계급투쟁이나 빈부격차에 관한 영화 같기도 하다. 현실에서도 그런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교통수단인데 열차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꼬리칸에서 앞쪽칸으로 올라갈수록 풍요로워지고, 꼬리칸은 몇 번에 걸쳐 반란을 시도한다.
“누구도 신발을 머리 위로 쓰지 않는다. 신발은 그러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애초에 당신들의 자리는 정해져 있어.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지.”
꼬리에 있는 너희는 계속 꼬리에 있으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뺏어가도, 제대로된 음식을 주지 않아도, 총으로 위협해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점에서 관객은 이미 꼬리칸에 이입하여 머리칸을 향해 함께 싸우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써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났을 때이다.
“우리는 엔진을 통제하고, 세상을 통제하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얼어 죽게 돼. 인구는 항상 균형을 맞춰야 해. 그래서 혁명이 필요한 거야. 혁명은 기능을 하지. 균형을 가져오지.”
“길리엄과 나는 협력 관계였네. 질서를 유지하려면 균형이 필요했지. 길리엄은 신화적인 존재였고, 자기 역할을 잘 수행했어.”
영화의 반전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최근에 본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매트릭스에서도 내가 가장 재밌게 본 장면이 스미스가 네오에게 ‘가상현실 매트릭스를 설계할 때 시행착오를 거친 과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고통이 없고 모두가 행복한 완전한 유토피아로 설정했을 때, 인간들은 그것에 적응하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고통과 불행을 통해 현실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적당한 고통과 불행이 있는 세계로 다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설국열차도 마찬가지로 기상 이변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든 하나의 인간세계이다. 설국열차 계급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길리엄이 가장 앞칸의 윌포드와 내통하고 있던 협력자였던 것. 길리엄은 설국열차 계급과 질서에 필요한 하나의 설계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혁명을 균형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행위로 본 것이다. 이 순간 영화는 계급투쟁에서 인간에 대한 본능과, 하나의 사회나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생각을 이동시킨다. 마치 감독이 관객에게 ‘그런 영화인 줄 알았지?’ 라고 한방 먹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윌포드의 말은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는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그래서 커티스가 갈등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커티스는 설국열차를 파괴하는 것을 택한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불편한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스스로도 매트릭스 사회에서 설계된 하나의 프로그램임을 알았음에도 자유의지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