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안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내가 세상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모습이 되었을 때, 누군가 어떤 조건 없이 나를 무한히 사랑할 수 있을까. 또는 내가 그런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내 전부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랑에 진심인 나도 스스로 던진 저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에밀 아자르 <자기앞의 생>은 세상이 정한 기준으로부터 조금의 결핍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로자 아줌마는 불법으로 성매매 여성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의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다. 그녀도 한때 몸을 팔았다. 지금은 늙고 병들었으며 살이 너무 쪄서 7층 계단을 오르기도 힘든 몸이다. 그녀는 유태인이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인지 제대로 잠들지도 못한다. 모모는 고아 아랍인이다. 어릴 적 기억이 없을 만큼 어린 시절, 부모가 로자 아줌마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났다. 이 책은 모모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공통점은 ‘둘 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로자 아줌마 때문일까. 모모는 부모가 필요한 줄 몰랐다. 그러나 로자 아줌마 집에 자기 아이들을 보러 찾아오는 엄마들을 보고, 엄마의 존재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모는 엄마가 찾아올까 관심을 끌기 위해 배가 아프기도 하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여기저기 똥을 싸대기도 한다. 부모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자신에게 똑똑하고 따뜻한 하밀할아버지는 말한다.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
어느 날 모모는 시내에서 개를 훔치기도 한다. 문제가 생겼다. 모모가 개를 너무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개에게 멋진 삶을 선물하고 싶어 마음씨 좋고 돈 많은 부인에게 개를 팔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받은 오백 프랑을 하수구에 버렸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카츠선생님에게 데려간다. 불안해하는 로자 아줌마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카츠 선생님. 그리고 울기 시작하는 모모.
“얘는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예요.”
“그렇다면, 벌써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암사자 얘기를 들려준다. 동물의 세계는 인간세계보다 훨씬 낫다고 하면서. 암사자들은 새끼를 위해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그 이후 모모는 매일 밤 암사자를 불러들인다. 모모가 상상으로 불러들인 암사자는 매일 밤 모모의 얼굴을 핥아준다. 모모의 결핍을 상상 속 암사자와 광대들이 채워주려 애쓴다.
모모에게 유일한 존재인 로자 아줌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이제 열 살(사실은 열 네 살)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돌보는 격이다. 로자 아줌마가 한때 모모가 자신의 품을 떠날까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제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죽어 자신을 떠날까 두렵다. 아무도 관심 없는 두 존재에게 서로가 삶을 지탱해준다. 모모에게 생은 로자 아줌마를 망친 망할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걸 안다. 마약을 하는 친구를 보고 생각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하긴 오죽이나 간절했으면 주사를 맞았을까마는 그따위 생각을 가진 녀석은 정말 바보천치다. … 아무튼 나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그냥 이대로 사는 게 더 좋다.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모모는 어떻게 벌써 알았을까. 행복에 익숙해지면 끝장이라는 것을. 고통 받은 적 없고, 불행해본 적 없는 사람은 절대 모를 이치를 자신의 생과 존재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는 모모는 알고 있었다. 모모는 백화점 앞 서커스 모형 진열장을 보고 생각한다.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 받지 않고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 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의 생은 계속 그녀를 파괴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죽을까 무서워 상상을 한다. 모모는 삶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행복해지기 위해 마약을 한다거나,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기껏해야 모모가 하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돈을 벌어 로자 아줌마에게 새 가발을 사주고 평온하게 죽어갈 수 있도록 별장을 하나 사 주는 상상이다.
모모는 백화점 앞에서 만난 한 여자 나딘을 따라간다. 나딘이 하는 일은 영화 위에 목소리를 입히는 일이다. 녹음을 하기 위해 화면을 여러 번 되돌린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화면을 보고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리고 그녀를 젊은 시절 아름다운 처녀로 만든다.
모모의 바람과 달리 로자 아줌마는 악화되고, 하밀 할아버지도 늙어간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죽는 것도 두렵지만, 죽음에 가까워진 그녀가 고통스럽게 삶을 연명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의학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끝까지 막으려 한다.
어느 날, 로자 아줌마의 집에 어떤 남자가 찾아온다. “제가 십일 년 전에 부인에게 제 아들을 맡겼습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가 아닌 다른 유태인 아이가 그 아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유태인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일 리 없다고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 똑똑한 모모는 남자가 말하는 아이가 자신인 것을 알고, 자신의 나이가 열 살이 아닌 열네 살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그 동안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다.
늙고 병들고 냄새나고, 세상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로자 아줌마는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라고 말한다. 모모는 생각한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라고.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로자 아줌마의 병세가 악화되자, 카츠 선생님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한다. 로자 아줌마를 절대 병원에 보내지 않기로 그녀와 약속한 모모는 거짓말을 한다. 로자 아줌마의 친척들이 아줌마를 데려오기로 했고 그녀는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고. 카츠 선생님은 말한다. "아랍인이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보내는 최초의 일이구나. 유태어를 할 줄 아는 아랍인은 아마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데리고 지하실로 이동한다. 지하실에 도착하자마자 로자 아줌마는 소파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이 방에서 죽어가는 것이 편안해보였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 옆에 누워 잠들고, 다시 일어났을 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숨을 쉬지 않았지만, 모모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모모는 그 옆에서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썼다. 모모는 죽은 로자 아줌마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겠다며. 결국 썩은 냄새를 맡고 로자 아줌마를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 모든 게 들통 났고 모모는 나딘의 집에 머문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 사랑해야 한다.
자신만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가 찾아오길 바라며 하는 관심끄는 행동들, 훔쳐온 개를 사랑하게 되자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더 좋은 곳으로 보내는 행동, 암사자는 새끼를 버리지 않기에 매일 밤 암사자를 불러들이는 상상, 서커스 모형을 보고 고통없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상상으로 로자 아줌마의 시간을 돌리는 것... 모모는 삶이 주는 고통에 아주 익숙해진 아이다. 행복은 찰나고, 순간이고, 짧으며 고통은 당연하듯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생을 바라보는 모모의 시선은 덤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짧게 찾아온 행복을 붙잡으려는 듯 어딘가 간절하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모모가 붙잡는 행복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를 간절히 빌게 된다.
소설만큼이나 저자 에밀 아자르의 인생은 인상깊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로맹 가리는 어느덧 자신이 ‘어떤 어떤 작가’라는 고정관념 속에 위치 지어진 기상작가일 뿐인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만들어준 얼굴에 로맹 가리는 무의식중에 거기에 동의했다. 그것이 더 편한 일이니까.
그러나 젊은 시절, 초창기, 첫 소설에 대한 향수,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에 시달린 로맹 가리는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삶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갈망은 온갖 다양한 형태와 가능성 속에서 아무리 다른 맛을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로맹 가리는 다시 시작했다. 61세,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고 한 번 받으면 다시 받지 못하는 콩쿠르 상을 다른 이름으로 또 받게 되었다. 아무도 둘이 동일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는 66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가 유서처럼 남긴 글을 통해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음이 세상에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