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그리고 속죄와 용서.
네흘류도프는 과거 유린하고 버린 카츄사와 재판장에서 재회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카츄사는 피고인으로. 그 날, 네흘류도프의 마음에서 도덕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 그러나 그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이 없다. 기독교에서는 죄를 자각하고 자기 죄의 무게로 무너지는 내면의 고통을 가장 큰 벌로 본다고 한다. 그가 죄를 자각하고 난 뒤 자신이 여태껏 발을 들여놓았던 상류사회가 타락했으며 위선적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진실을 깨닫게 될수록 네흘류도프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까지 한다. 그리고 십 년 동안 누렸던 안락함과 편안함, 편리함을 버리고 카츄사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또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나선다. 그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법의 부조리, 종교의 위선, 귀족 계층의 타락을 느낀다. 사람들을 감옥에 넣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실제로 이런 행위로 범죄율이 줄어들지 않는다) 관료주의적, 기계적, 절차적 제도일 뿐이라는 것, 성경에 쓰인 내용과는 달리 종교 종사자들은 고통 받는 자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권위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체제로 교회를 이용한다는 것, 귀족들의 일상은 어떠한가. 무도회, 사교, 겉치레 등. 안락한 삶을 향유하기 위해 그들은 죄의식을 외면한다.
선과 악은 절대적일까. 선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악은 언제나 옳지 않다.(그리고 선과 악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기 처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악에 대한 개념을 왜곡한다. ‘선이 옳다’는 사실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여태껏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불편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일까 오늘날의 시대는 선함을 격하하기까지 한다. 바보, 답답함, 호구…. 악역을 매력적으로 그리고 악함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속은 사람은 바보이고 속이는 자는 유능하다는 뒤틀린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 마음 속 악함을 합리화하는 걸까.
상류계층에 속해 영원히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안락한 삶을 누려도 됐을 네흘류도프는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카츄사를 향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죄를 씻기 위해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모두가 이런 감정을 겪어봤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 줬던 순간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떠오르면 괴로움에 금세 생각의 회로를 돌려버린다. 어차피 지난 일이야. 어차피 앞으로 볼 일 없어. 그러나 그런 말이 있다. 진실을 접했을 때 불쾌한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 진실을 감추는 것보다 차라리 불쾌감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고 세상의 이치는 단순하지 않다. 회개나 양심의 가책이 상처 입은 자를 책임지지 못하며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진정한 속죄를 향한 첫 걸음은 자기 자신의 악함을 마주하고 고통과 불쾌감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