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평화기행을 다녀와서(2)
이번 평화기행에서 만난 몇 가지 만남을 중심으로 글들을 두서없이 편하게 적어 보려 합니다.
그중 첫 번째로 91세이신 1세대 실향민 김ㅇㅇ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간략하게 적어 봅니다.
김ㅇㅇ 할아버지가 91세라고 하셔서 제대로 소통이 되실까 사실 우려를 많이 한 상태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첫 만남에서 91세 어르신이신지라 몸도 많이 왜소해져 계시고 눈동자도 좀 흐릿한 거 같고 해서 "대화가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만, 북한의 가족과 어르신이 걸어온 삶에 대해 말씀을 해주실 때는 아주 초롱초롱하시고 정확한 딕션으로 말씀 나눠 주셨습니다.
6.25 전쟁이 나기 전에 원래 38선은 양양이었고 고성은 북한에 속한 지역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 막바지에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제가 사는 서울/경기를 포함한 소위 영서지방의 전쟁은 UN군이 주도해서 진행을 했기에 빨리 전쟁을 종료하고 마무리하길 원한 반면, 영동지방은 한국군과 미국 해병대에 작전권한이 있었기에 죽기 살기로 조금이라도 휴전 전에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성과 인근을 중심으로 굉장히 번번이 국군과 북한군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그 와중에 막바지에 북한군이 내려올 때, 남은 남자들이 북한군이 되거나 전쟁에 필요한 노역에 동원될 것을 우려한 국군들이 다시 국군이 올라올 테니 잠시만 남쪽 위수지역으로 다 내려가라고 독려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북에 두고 아버지와 남자 어른들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기에 다시 국군이 올라가면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원한 이별이 되어 버리셨다며 덤덤히 말씀하시는데, 그 마음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저는 먹먹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내려올 때 17살이었어요. 사춘기였고 여동생에게 "이거 해", "저거 해라" 엄한척하며 시키기만 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주고 헤어진 게 너무 가슴 아파요"
"전쟁은 하면 안돼요"
"20년 전에 이산가족 찾기를 하길래 신청했는데, 나는 그때 나이가 70이라 아직 젊다고 나이 많으신 분들하고 하라고 해서 신청에서 떨어졌어요. 때가 되면 할 줄 알았는데, 그 뒤에 지금까지 못했어요"
91세가 되셔서 이제는 덤덤히 말씀하시는 어르신이었지만, 여동생에 대한 얘기와 이산가족 찾기를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 이제는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들의 얘기에서는 여전히 감정이 올라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들과 처가식구들까지 다 남한사람이어서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해 보려 노력은 하며 살지만, 그 깊은 슬픔과 그리움, 아픔을 이분들만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난번 일본 재일교포들과 나누며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향민 1세대는 일평생 가족들을 이렇게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다 70여 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 대부분 돌아가시거나 이 김ㅇㅇ 할아버지처럼 그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신데, 우리 사회와 우리들은 당장 우리 삶에 별다른 영향이 없고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기에 외면하고 우리들 삶에서 떼어내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슬픔과 아픔의 자국은 우리가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일상의 삶에 영향이 없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픔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다 막혀버린 거 같은 이 시대에 어떻게 새롭게 이 막힌 절망을 풀어내 볼 수 있을까?
많은 생각과 고민 속에 김ㅇㅇ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마쳤습니다.
ps. 할아버지 얼굴을 노출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거 같아서 오늘 글은 따로 이미지를 넣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