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오후의 시네마 파라디소
여기 아파트는 일층이라 어둡다. 앞창으로는 낮은 상가들, 뒤편 창으로는 드높은 뒷동이 보일 뿐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 날씨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목을 길게 빼고 창밖 하늘을 굳이 내다보거나 핸드폰 기상 예보를 들여다봐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해만 떠오르면 바깥의 건물 벽과 유리창, 드문드문 창을 가리는 벗은 나무들과 촘촘한 갈색 창살 사이를 지나서 비쳐드는 햇살만으로도 아침과 오후, 따슨 날과 차가운 날의 온도는 충분히 전해진다. 내 정서의 온도계는 언제나 햇살이다.
햇살이 세상 위에 만드는 소리 없는 변화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건너왔던 양수의 바다 건너편에도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해 질 녘에 그곳을 떠났던 것 아닐까. 깊고 붉은빛에 잠겨 있는 것들에게 뭔가를 못다 이르고 떠나 왔던 걸까. 내가 우주의 유일한 존재라면 아마도 나는 그것들을 지닌 채로 바다 이 편으로 건너왔을 것이다. 혹은 따라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면 내 안에 귀환을 위한 도장 같은 동공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사물들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길어지고 희고 밝던 빛살이 붉고 어둡게 짙어질 무렵, 넋 놓는 상념이 허락되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나를 건드리러 오는 고집 강한 기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작 기억의 몸통인 사건 자체는 기억 안에 없고 그 그림자 혼자서 나를 찾아온다.
삶의 시간이 해 질 녘도 훨씬 지나버린 두 노인과 함께 느린 시간을 보내는 하루의 오후, 겹쳐 사열한 건물들 사이를 통과한 햇살 조각은 오늘도 어김없이 뒷 동 아파트 흰 벽 허리쯤에 떨어지고 그 광경을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다시 창곁으로 다가선다.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해서 그 누구의 눈길도 끌 수 없을 것 같은 벽면에 잊지 않고 여러 차례 셔터도 눌러 둔다. 늘 기록하는 비슷비슷한 장면들. 아버지는 오래전에 내 그림들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는 맨날 그렇게 남의 집 벼름빡만 그리냐” 내 둘레에 수많은 벼름빡들을 둘러주고 그 안팎에서의 삶을 꾸려주던 사람은 정작 알아보지 못하는 정경 어디쯤을 나는 아직도 맴돌고 있다.
창틀에 턱을 괴면 먼 시간 건너편의 키네마 극장 앞 광장과 대학원 실기실 앞 복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유사 장면들의 연속 컷이 흰 벽 위에 무성으로 영사되기 시작한다. 한가닥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작은 여자 아이가 콘크리트 볼라드에 걸터앉아 공터에 그림자를 떨구고 있고, 테라조 복도 바닥에 떨어져 누운 햇살의 나열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뒷 실루엣이 줌아웃되는 컷이 대체로 그 첫 장면이다. 그 뒤를 이어 의식의 기억 속에 상주하지 못하던 풍경들이 때 만난 듯 주르르 풀어져 나오는 - 내 기억의 영사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항상 그렇다. 촉발과 더불은 간단없는 전개. 기억의 릴(reel)을 끝없이 되감게 하는 버튼인 내 존재의 불시착 지점으로부터 걸어 나가는 시간을 나는 놓쳐버렸던 건지.
가 본 적 없던 먼 나라 소년의 긴 성장 이야기인 시네마 천국을 지배하는 정서가 그토록 금세 내게 흡수되어 온 이유도 내 기억의 영사방식이 영화의 전개 방식과 닮아있던 때문 같기도 하다. 정서의 원형들은 문화의 회로를 타지 않고 무선으로도 곧잘 연결되곤 하니까. 다만 알프레도가 짜기운 금기의 몽타주가 사랑하는 이들의 입맞춤이 만드는 화려한 역동의 연속이라면 나의 몽타주는 햇살과 그림자들이 암시하는 존재의 우수 - 아직 깨뜨려지지 못한 정지와 고요의 연속이다. 그 장소 속 어딘가로 내려서서 배회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은 그 횡보 중에 더러 어린 토토의 눈빛 같고 엘레나의 이마 같이 예쁘장한 기념품을 몇 개씩 줍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내 행차를 완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토토의 해소되지 않은 결핍의 정수리를 덮고 있던 베일이 걷히기 위해 필요했던 알프레도의 죽음과 첫사랑의 죽음과 파라디소 극장의 죽음은 내 고집스런 기억의 몽타주 속에서 어떤 것들일까. 내가 그 베일을 뚫고 배어나는 빛을 향해 굴광동물처럼 느리게 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지도 얼마나 만년의 일인지. 저나 나 같은 부류들 안에는 태생의 우울이 있는 것 같다는 오랜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안고 태어난, 이 세상 저편에서부터 지니고 건너온 것. 그래서 더욱 만져보고 알아보기 힘든 것.
내 안에 남아있는 작은 여자아이는 아직도 집 안 어느 한 자리, 빛이 드는 바닥에 상을 펴고 앉아 사각사각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싶어 한다. 그림의 재료인 기억의 장면들을 검열하고 끊어내는 사람, 그것을 이어 붙여 다시 보게 해주는 사건 - 내 기억의 서사에는 아직 등장하지 못한 것들을 무의식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해 떨어지는 광장으로 내려서는 놀이를 그만두지 않고 내내 기다리는 그 시간으로부터 날 내보내줄 알프레도의 부고를 나는 종내 받을 수 있기는 한 걸까? 먼바다를 건너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슈트 케이스를 밀고 들어서는 내 존재의 친정집. 그 현관문을 들어서면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만 한 알프레도는 유품도 남기지 않고 이미 죽어버린 건 아닌지. 혹은 아직까지 여전한 그의 부재는 내가 굳이 몸을 끌고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존재임을 시사하는 건 아닌지. 기억의 그림자를 따라 걸어온 긴 배회의 여로 여기쯤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뜻밖인 장면을 만난다.
어스름 해져가는 봄날 저녁에
밥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 있는 집으로
발걸음 옮기는 나직한 행복
밥냄새와 그릇 소음이
사람 먼저 문을 열고 나와 반기는
산들바람 품 안처럼 따스한 내 집
몇 해전 친정집 부근을 거닐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만난 감상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이 태생 전 기억의 그림자와 아파트 주차장 앞 아스팔트 위를 걷던 여자의 만남이 일으킨 소리 없는 충돌음으로 새롭게 회고된다.
존재의 동공을 메워주는 것은 뜻밖에도 시공의 유리 천장 아래 나직한 곳,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놓여 있는 평범한 것에 간직되어 있을 수도 있음을 지나가는 새 그림자 보듯 희뜩 구경하는 - 그 선물을 만나기 위해 나는 굳이 매번 넓고 넓은 바다를 건너야 했던 걸까. 이미 모태 안의 따뜻한 바다 안에서도 안고 놀던 작고 가벼운 것. 수십 년 전에 나를 부딪고 떠났던 빛살과 오늘 여기서 조우하는 환한 놀라움.
그것은 토토를 떠나게 했고, 이해와 용서의 선물이 기다리는 영혼의 고향 방문을 마련했고, 그리고 다시 지금 삶의 자리로 돌려보내 주었던 알프레도의 얼굴을 빌린,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나 자신 본래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나의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되풀이 관람하며 오래오래 새겨본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