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거울
뒤집어쓴 이불 사이를 빠져나오는 아이 웃음소리 같은 새의 지저귐이 푹신한 하늘 저 안 여기저기로부터 삐져나오기 시작한다. 올려다봐도 새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데, 따끔따끔 터져 나오는 그 소리는 굳은 피부 아래 깊은 속살을 건드린다. 설렘. 소리 없이 켜지는 그 기능의 뿌리는 아직도 내 유년의 봄 들판에 남아 있는 건지.
“무슨 새야?” 나의 물음에 그 소녀는 “종달새”라고 대답했었다. 하늘은 갑자기 가벼워졌고, 종달새는 봄 하늘에서 흩어져 내리는 모든 새소리의 주인이 되었다.
옅은 안개가 먼 산을 지워버리던 봄날 아침. 들판 끝까지 걸어가면 땅끝 지평선에 닿을 것만 같아 조금은 두렵던 마음이었다. 무리 중에 가장 어리고 체구도 작은 나를 끼워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너른 땅을 가로질러 산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흙에 묻혀 있는 냉이와 시금치를 뽑아 바구니를 채우면서 내게 시금치와 냉이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작은 칼로 어떻게 그것을 흙으로부터 캐내는지도 보여주며. 바닥에 납작하게 펼쳐진 시금치의 빨간 궁뎅이는 달고, 냉이로 끓인 국의 향기를 따를 것이 없으며, 무성한 덤불 가지에 움돋고 있는 진달래는 창꽃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아직은 서로에게 수줍었지만 동네 아이들은 머릿수로 그 어색함을 덮었고, 나는 무지와 얌전함으로 행렬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산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들판 위를 행진했다. 쏙쏙이는 종달새 소리가 줄곧 따라오고, 차가운 흙을 훑던 바람이 햇살에 데워져 갈 때 내 안에 고물거리는 무언가가 차오르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아지랑이다!”소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처음으로 구경하는 투명한 연기가 산 아랫자락을 흔들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 종탑이 올려다보이는 풀밭에 자리를 고르고 가져온 점심을 풀기로 했다. 내가 보라색 네모난 찬합을 무릎에 안고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을 때 아이들의 눈길이 내게로 쏟아졌다. 모아놓은 바구니에서 스며 나오는 푸성귀의 향기를 누르며 저마다의 도시락이 풍미를 피워 올리던 중, 그들을 밀치며 폭발하듯 풍겨 나온 내 도시락의 고소한 야채튀김 냄새는 그 즉시 하늘을 맴도는 봄 향기가 되었다. 낯선 동네 아이들이 재미를 부풀려 제안한 한마디에 혹해서 봄나들이를 고집하는 나에게 끝까지 싫은 내색이던 엄마 대신 할매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도시락을 한가득 채워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부엌에서 튀김을 만들던 할매의 손길이 아이들에게 익숙하게 가 닿았고, 나는 그것이 그렇게도 기분 좋았다. 채 썬 감자와 당근과 양파를 얇은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겨낸, 갓난쟁이 주먹만 한 튀김의 그 냄새는 내가 아직도 똑같은 레시피의 음식을 즐겨 식탁에 올리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우리를 한 칸 더 가깝게 묶어 주었던 그 맛은 나를 지나 내 아이들에게도 건너갔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들도 그날을 나처럼 기억하고 있을까? 생애 첫 봄소풍을 선사해 주었고, 하늘 안에서 우는 새의 이름을 종달새라고 말해 주었던 그 소녀는 상상할 수 있을지. 내가 고향과 이국에서 만나고 떠나보낸 수많은 봄이 그 봄의 변주였다는 것을.
겨울 내내 잦았던 폭우가 메마른 땅 각질 깊이까지를 속속들이 적셔 놓았다. 그 물을 양껏 마신 푸른 것들이 일제히 지각을 뚫고 올라와 느린 언덕을 빈틈없이 덮었다. 다 자란 속대 끝이 여린 풀꽃까지 피워내니 녹색 일색이던 천지가 소리 없이 노란 기운을 입기 시작한다. 올해는 사막 토양 아래 버티던 무수한 씨앗들이 대지 위에 꽃물결로 넘실거릴 슈퍼블룸(Superbloom)을 기대할 만하다 하니, 머쟎아 씨앗들의 은하수가 봄 들판으로 쏟아져 내리겠다. 혹한이나 메마름 끝의 개화는 이제 비슷한 모습으로 내 안의 아지랑이 뒤편에서 흔들린다.
종달새가 지저귀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들판의 신비한 기운을 입은 봄을 기다리느라, 엄연히 도착한 봄을 거부하기도 했다. 부화한 아기 새들 울음이 처마마다 자지러지고 노랑나비들이 팔락이며 정원을 건너 다녀도, 겨울을 지우며 들판을 채워 오던 그 봄의 독특한 기운과의 접목을 기다리면서 내 앞에서 하늘거리는 것들에게 미안해하던 날들이 있었다.
커다란 저택들이 모여 선 맞은편 언덕 능선을 따라 드문드문 흩어진 오크 트리 주변으로 부드러운 풀밭이 다시금 펼쳐졌다. 사계절이 뚜렷치 않은 이곳에서도 하늘은 엄연히 다른 빛깔로 봄의 언덕을 만들어 낸다. 풀밭 군데군데 꽃무리가 망울을 맺기 시작할 무렵이면 길고 둥근언덕 꼭지에 날아와 머무르곤 하는 노래 하나와 마주한다. 나의 봄을 부르는 주문 같은 노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멀리서 거대한 꽃무리가 물결치고, 하늘 안에 숨어 우는 종달새 소리는 깜빡깜빡 기억을 켜고 끈다.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차창을 넘어 가슴에 달려들고 그 바람에 나무와 풀밭이 뒤편으로 밀려나며 내 기억의 풍경을 훑어간다. 먼 언덕 위 겨자꽃이 만발한 속을 바구니를 든 어린 내가 자박자박 걷고 있다. 운전대를 잡은 채 지나치는 조그만 등에 어른대는 것이 꼭 아지랑이 같기만 한데 그 일렁이는 공기 저편에서 아이는 오른쪽 언덕 모퉁이로 사라진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찻길로 들어설 때 옆거울을 흘낏 보니 빈 거울 안에는 하늘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