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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Dec 17. 2019

나는 너를 마시멜로해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대상의 변질은 대체로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화로부터 문제가 발생하듯이, 좋은 것들이 언어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불쑥 나타나, 우리의 관계가 갖는 특이함을 닳아빠진 상투어와 관례적인 서식에 의해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존재한다.

 

아토포스 (ATOPOS)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 아토포스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a와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topos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대화 상대로부터 부여받은 명칭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람을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는 유일하고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상투적인 타인들의 말에 포함될 수 없는 빛나는 독창성을 지녔다. 이는 단 하나의 내 진실의 형상이다.  


‘꼭 맞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표현 욕구는 마음을 그저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진부함과 불투명한 은유 사이에서 고민한다. 단어에 비해 마음의 심연은 너무 깊고 복잡하다. 나는 언어 바깥에 있다. 사랑은 물론 내 언어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나는 상대를 모든 종류의 평가에서 제외시킨다. 아토포스는 묘사나 정의, 언어, 이름의 분류인 '마야(maya)'에 저항한다. 분류될 수 없는 그 사람은 언어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어떠한 수식어를 사용하더라도 명확히 특징지어 표현할 수 없다. 다음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한 부분이다.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은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사람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은 상상계의 영역으로, 이는 언어 바깥에 있다. 따라서 그저 여러 가지 술어로 대상을 뒷받침함으로써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녀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나에게 온 듯 하다’와 같이 은유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는 것이다.




영화 <옥희의 영화>의 한 장면으로, 극 중 영화감독 진구(이선균)는 자신의 영화의 주제를 묻는 관객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 하루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인상을 받고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또 그 사람을 내일 만나게 되면, 또 다른 면을 보고 또 다른 거를 판단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 희망은 제 영화가 그렇게 살아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주제의식에서 시작하면 안 되고 그런 거죠. 다 몰리게 되니까.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보면 주제의식으로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찾게 되는 거고,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고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 때부터 주제의식은 뭡니까 그런 거 맨날 물어보니까. 영화를 볼 때 그런 거 없어도 우리는 다 느끼고 반응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거 재미가 없어요. 깔때기로 모으는 거 같은 거. 참 단순해요.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정의 내려질 수 없는 아토포스로 인식되길 바랬던 것 같다. 자신의 영화가 진정으로 사랑받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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