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닫힌 방>
~스포일러~
"타인은 지옥이다"는 흔히 인용되는 문장으로, 이제는 너무 유명한 어구가 된 나머지 진부해진 감도 있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은 이 표현이 처음 나온 작품이다. 자신의 철학 그 자체를 이미지로 표현해낸 흥미로운 희곡이다. 그의 희곡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며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다.
지옥으로 상정되는 한 공간이 있다. 이 곳으로 죽은 세 영혼이 차례로 들어온다. 이들의 이름은 가르생, 이네스, 에스텔이다. 그들은 창문도 출구도 없이 고립된 공간에 셋이 영원히 함께 해야 한다는 벌을 받는다. 극이 진행되며 각자는 자신이 죽은 사연과 과거의 죄를 고백한다. 각각의 욕망과 비밀이 얽히며, 각각 다른 사람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가르생은 이네스에게 자신이 비겁자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어하고, 동성애자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욕망하며, 이성의 욕망을 원하는 에스텔은 가르생을 원한다.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를 쫓는 악순환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출구 없는 방에서 공존 그 자체만으로 지옥이 되었다.
이네스 당신 입 좀 가만히 둘 수 없어요? 당신 코 밑에서 팽이처럼 계속 돌고 있네요.
가르생 죄송하게 됐습니다. 내가 그러고 있는 줄 몰랐군요.
이네스 내가 당신한테 지적하고 싶은 게 그거예요. (가르생 입의 경련) 또 그러시네! 당신은 말로만 예의를 찾고 얼굴은 방치해 두는군요. 당신 혼자 있는 게 아니니 그 겁에 질린 꼴로 나까지 전염시킬 권리는 없는 거예요.
이네스는 셋 중 가장 직설적이고 파괴적인 캐릭터이다. 처음 만나자마자 적대적으로 가르생의 표정을 지적한다. 그녀의 지적에 따라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오브제로 인식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땐 의식하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파묻고 숨기게 된다. 이네스의 시선 앞에서 가르생이 느끼는 감정은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수치심이다. 그녀의 의식 앞에서 그는 대상, 객체로 전락했다.
이러한 곤경에 맞서 가르생은 두 사람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한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따로 지내며 다른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의 행동이라 말한다. 각자가 자기만의 구석에 머무르며 다른 이들에겐 신경 쓰지 않기를 제안한다.
가르생 (다정한 어조로) 난 당신들의 사형집행인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들한테 어떤 해도 끼치고 싶지 않고 당신들한테 아무 볼일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자, 이렇게 합시다. 각자 자기 자리에 가만히 있자고요, 열병식을 하는 거죠. 당신은 여기, 당신은 여기, 나는 저기에. 그러고는 침묵하는 겁니다. 한 마디도 안 하기, 어렵지 않잖아요? 우리들 모두는 혼자서도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니까요. 난 일만 년이라도 말 안 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스텔 그럼, 나도 입을 다물어야 하나요?
가르생 네. 그러면 우린 구원받게 될 겁니다. 입 다물기. 자기 속만 들여다보고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기. 동의하는 거죠?
이네스 좋아요.
에스텔 (주저하다가) 좋아요.
가르생 그럼, 안녕히.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는 왜 같은 엘리베이터 안의 저 사람이 불편할까? 인간은 모두 초월적 의식을 가진 대자존재이다. 대상이 존재하는 순간, 인간의 의식은 즉각 자기에게서 빠져나가 대상을 향해 달려간다. 관심, 긴장, 경계 무엇이든 타인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네스 아! 잊어버린다. 참 유치하네요. 난 당신을 내 뼛속에서까지 느끼는데. 당신의 침묵은 내 귓속에서 울려 대고. 당신은 입에 단단히 못질을 하고 당신 혀를 잘라낼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존재하고 있는 걸 막을 수 있겠어요? 당신 생각을 멈추기라도 하겠어요? 난 그 생각이 들려요. 마치 자명종 시계처럼 똑딱거리죠. 그리고 당신한테도 내 생각이 들린다는 걸 알아요. 그렇게 의자 위에 웅크리고 있어 봐야 소용없이 당신은 도처에 있어요.
가르생은 자신이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친 비겁자가 아닐까 괴로워한다. 그는 사후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사고 속의 자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타인들이 자신을 비겁자라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 자신이 가진 이미지다. 이미 죽은 이상 땅 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할 기회조차도 주어져있지 않다. 그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인생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며 이네스를 설득하고자 한다.
이네스 당신은 비겁한 사람이야, 가르생, 비겁자라고,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 내가 그걸 원한다고. 듣고 있어? 내가 그걸 원해. 그런데 봐, 내가 얼마나 약한지, 하나의 숨결일 뿐이지. 당신을 쳐다보는 시선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을 생각하는 이 무색의 사유일 뿐이지.
이네스의 말대로 그녀의 시선은 한갓 눈길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갓 시선만으로도 개인은 흔들릴 수 있다. 시선은 그 자체만으로 타인에 대한 냉혹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을 구속하고 자유를 제한한다.
본인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확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다. 진정한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자신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타자에 의해 인정을 받고 객관성을 확보해야만 비로소 굳건해진다.
자신이 비겁하지 않다 주장하는 가르생의 추상적인 자기의식은 전혀 실재성이 없다. 이는 공허한 관념적인 자아이다. 그렇기에 이네스를 자신의 존재 증명의 매개 수단으로 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계속해서 인정을 갈구한다. 이네스와 달리, 가르생을 욕망하는 에스텔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맹세를 약속한다.
가르생 맹세만 해준다면 난 저 위에 있는 자들이나 여기 있는 자들 모두를 무시할 수 있어. 에스텔, 우린 드디어 지옥에서 나갈거야. (이네스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는 말하다 말고 그녀를 쳐다본다.) 뭐가 문제지?
이네스 (웃으면서) 아니 저 애는 자기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안 믿는데,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순진할 수 있지? "에스텔, 내가 비겁한 놈이야?" 저 애가 속으로 얼마나 비웃겠어!
에스텔 이네스! (가르생에게) 저 여자 말 듣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믿어 주기 바란다면 나부터 먼저 믿어 줘야죠.
이네스 아, 그럼, 그럼! 그 애 말 좀 믿어 줘. 저 애는 남자가 필요해, 딱 보면 알잖아, 자기 허리를 감싸 주는 남자의 팔, 체취, 남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욕망이 필요한 거지. 그 나머지 것들이야 뭐... 하! 저 애는 널 하나님 아버지라고도 부를걸? 네 비위를 맞출 수만 있다면.
가르생 에스텔! 그게 정말이야? 대답해, 그게 정말이야?
에스텔 내가 뭐라고 해 주면 좋겠어요? 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녀는 발을 구른다.) 대체 뭐가 이렇게 성가신지 모르겠네! 당신이 비겁자라 해도 난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자, 이걸로 부족해요?
(사이)
가르생 (두 사람에게) 당신들 역겨워!
가르생을 원하는 에스텔은 자신의 의식을 포기했다. 자신의 자유를 내팽개치고 그에게 예속되었다. 다시 말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였으므로 그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참된 인정은 자기와 동등한 주체에게서 올 때 진정으로 보장된다. 자기 정체성은 나와 완전히 대등한 또 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되어야만이 비로소 가치가 있다. 자신을 원하기에 사물 같은 즉자존재로 전락한 에스텔에게서 가르생은 자기의식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가르생 (천천히) 아니, 이 문이 어떻게 열렸지?
이네스 뭘 기다려요? 가요. 빨리 가버려요!
가르생 안 갈 거요.
이네스 너는, 에스텔? (에스텔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네스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럼 셋 중에 누구죠? 문은 활짝 열렸는데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게 누구지? 허 참! 웃겨 죽겠군. 우린 서로 헤어질 수도 없는 처지군.
세 사람은 문이 열렸는데도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방을 탈출해 홀로 고립되는 것보다는, 갈등 속의 공존을 택했다. 사실 고립이야말로 지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자기의식을 완성해줄 존재가 타자라면, 인간의 정체성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 안에 있다.
(에스텔이 탁자 위에서 종이칼을 집는다. 이네스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몇 차례 찌른다.)
이네스 (몸부림치면서 웃음을 터뜨리며) 뭐 하니, 뭐 해, 너 미쳤어? 나 이미 죽은 거 잘 알잖아.
에스텔 죽었다고?
(에스텔이 칼을 떨어뜨린다. 그 사이, 이네스가 칼을 집어서 자신을 마구 찌른다.)
이네스 죽었다고! 죽었어! 죽었어! 칼도, 독약도, 밧줄도 안 돼. 이미 끝난 일이야, 알아들어? 그리고 우린 언제까지나 함께 있는 거야. (웃는다.)
에스텔 (웃음을 터뜨리며) 언제까지나, 이런, 진짜 웃기는군. 언제까지나라니!
가르생 (두 여자를 쳐다보며 웃는다) 언제까지나.
서로 쫓고 쫓기는 욕망의 뫼비우스는 계속된다. 그들 욕망의 목표는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자기의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끝내 충족될 수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게 된다. 욕망의 중심과 기준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욕망을 채워줄 타자는 동일자인 나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한에 대한 유한의 욕망이다.
"나를 잡아먹을 듯한 모든 시선들을.... 이런! 당신들 둘밖에 안 돼? 난 당신들이 훨씬 많은 줄 알았지 뭐야.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전에는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인간들 사이의 화해는 아예 배제된다. 하지만 <닫힌 방>을 집필한 지 15년 후의 그는 타인은 지옥이다는 말의 뜻이 다소 왜곡되었다고 설명한다. 상대방과 나의 관계가 뒤틀리거나 악화되어 타락한 경우에만이 말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이해하는 데 타인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타자는 나의 통제 밖에 존재하는 무한의 이념이다. 나에게 종속시킬 수 없기에 갈등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완고한 나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홀로만의 존재방식 안에서는 한 번도 재고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타자와의 공존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사르트르 또한 이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모습을 못 보면 나를 만져봐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