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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Sep 26. 2019

술과 책의 조합

연희동 <책바> 방문


술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고? 처음에 들었을 땐 의아했었다. 머리에 뭐가 들어오기나 할까..


속는 셈 치고 해 봤는데, 이건 신세계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물론 비문학이나 소설 읽을 때 도수 높은 술은 힘들지만. 같은 부분 계속 읽는 렉 걸림.. 대신 시 읽을 땐 정말로 딱이다. 혼자 맥주 마실 때 보통 영화를 봤었는데, 요새는 시 읽기에 맛 들렸다. 평소엔 시를 잘 안 읽는다. 시 읽을 땐 시인과 나의 주파수가 맞아야 하는 것 같다. 근데 감성적이게 될 때 빼곤 좀 집중하기 어렵고 잘 안 와닿는다. 적당한 음주는 감수성을 끌어올려줌으로써 몰입을 돕는다. 저자가 어떤 심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그 마음이 전보다 오롯이 전해진다.


최근 들어 서점과 바를 결합한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책+술을 결합한 공간이라니! 이또한 신세계였다. <바다 냄새가 코끝에>는 제주도의 이색 독립서점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제주도의 알로하 서재는 맥주 창고였던 공간을 개조해 술 마시며 책 읽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그곳은 제주도.. 가까운 곳엔 이런데 없나 찾아봤다. 그렇게 연희동의 '책바'를 알게 됐다.


친절한 사장님이 웃으며 반겨주셨다. 매장엔 잔잔한 재즈 음악이 깔리고 있었다. 1인 손님 위주의 조용조용한 분위기.


아늑한 분위기
오늘의 내 자리

보통의 책맥 공간은 맥주 위주로 판매하고, 주종이 한정되어 있다. 근데 책바는 주종이 정말 다양하다. 이 곳만의 칵테일도 있다. 가게 이름처럼 책과 bar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곳이다.


메뉴는 도수에 따라 시/에세이/소설 파트로 나눠져 있었다. 시 읽을 땐 도수 40도 정도의 높은 술, 에세이는 도수 25도 이하의 술, 소설은 낮은 도수의 술. 오늘은 시를 읽으러 왔으니까 시 메뉴를 훑어봤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 메뉴들이었다. 양주 알못인 나는 이름만 봐선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추천을 받았다. 달지 않고 무거운 걸 좋아한다 하니, ‘올드 패션드’를 추천해 주셨다.


책 속의 그 술

올드 패션드는 <책 속의 그 술>이라는 메뉴의 칵테일이었다. <캐롤>에 나온 술이다. 책 속에 그 술 메뉴는 일반 메뉴와는 별개로 따로 소개되어 있다. 술이 등장한 책의 문단과 함께. 직접 마셔보면서 그 책을 읽으면 기분이 되게 남다를 것 같다. 타깃층의 취향을 완벽하게 간파한 아이디어 ~ 미쳤다 ~


여인은 설탕을 뺀 올드 패션드를 시키며 데레즈에게도 이거나 셰리주를 권했다. 테레즈가 망설이자 여인은 같은 것을 주문하며 웨이터를 돌려보냈다. (중략) 여인의 눈동자는 뭐든 쳐다보기만 하면 완벽히 꿰뚫어 볼 것 같기 때문이다.


향긋한 오렌지 껍질 향과 묵직한 위스키의 조합이 잘 어울렸다. 잔잔한 재즈 BGM 중간중간엔 귀에 익은 노래도 나왔다.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코너도 따로 있고, 책바에서 제작한 출간물 등 신선한 책이 많이 보였다. 이런 것도 좋다. 이런 책은 정말 우연으로밖에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반갑다. 우연히 만난 책만이 갖는 매력. <뒤척임의 잔망> 은 제목만 보고 고른 시집이다.  왓챠에 기록하려 해도 안 나오는 독립 출판물. 왓챠 기록이 쌓이면 빅데이터가 예상 평점을 알려준다. 이게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별점을 맹신하진 않지만, 그래도 높은 예상 평점이 나오면 읽기 전에 기대가 커진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독립출판물은 이런 선입견 없이 깨끗한 도화지 상태에서 읽게 된다. 이렇게 읽은 책이 마침 취향이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옛날엔 인상 깊은 구절을 만나면, 두고두고 기억하려 사진을 찍었다. 근데 이런 구절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사진만 쌓이고, 결국 나중에 보진 않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을 찍지도 필사를 하지도 않은 구절이 나중엔 더 기억에 남는다. 흔적이 없으니 기억에라도 오래오래 남기려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사진 찍는 버릇을 줄이게 됐다.(그래도 어젠 몇 장 찍음)


두 번째로 주문한 술은 '압생트'이다. 압생트도 책 속의 그 술 메뉴이다. <인간실격>의 요조가 즐겨마신 술. 그가 꽃피우고자 했던 예술은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마침 또 벽에는 그의 그림이 붙여져 있었다. 압생트는 생전에 고흐가 사랑했던 독주이기도 하다. 압생트를 주문하니 사장님은 향이 특이한데 괜찮냐고 물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술인가 보다. 그럴수록 더 궁금하고 시도해보고 싶어진다. 사진은 못 찍었다.. 에메랄드 빛의 예쁜 술이었다. 쑥? 민트향과 단맛이 느껴졌다. 그냥저냥 괜찮았다.


책바 출간물도 읽어 봤다. 제목은 <우리가 술을 마시며 쓴 글>. 책바에 방문한 손님들의 글이 모여 만들어진 책이다. 알콜의 힘으로 숨겨진 감수성과 창의성을 끄집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상도 손님들의 투표로 이뤄졌다. 수록된 소설과 에세이에 빠져 읽다 보니 막차 시간이 돼버렸다. 집만 가까웠으면 완벽한데.. 책바 출간물은 아껴놨다 다음에 또 와서 읽어야지.


정말 정말 취향인 곳이었다. 오바하자면 연희동으로 이사가고 싶을만큼! 쓰레빠 끌고 나갈 수 있는 집앞에 이런 곳이 있다면 참 좋겠다.

별 다섯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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