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명예시민
재작년 겨울, 통영으로 떠났다.
홀로 떠난 첫 여행. 11월 말임에도 니트 하나만 입고 돌아다녀도 따뜻했던 그날의 날씨와 공기까지 다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통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됐다. 다녀와서도 주위에 통영 예찬론을 펼치고 다녔다. 명예시민 시켜줘요..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으면, 어딜 가든 행복하다 했다. 여행이란 특수 상황은 보통 이 두 가지의 기반이 다 갖춰져 있다. 그러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행 좋아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통영은 달랐다.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통영만큼 좋았던 곳은 없었다. 그냥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윤슬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지나고보니 어쩌면 그래서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묘하게 막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이 고가도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인지 몰랐는데" 그들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대화의 흐름과 리듬은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동행은 그에 계속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옆에 친구가 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윤슬 바라보기에만 빠져있기 쉽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정상으로 보이려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관성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게다가 동행자와 함께일 땐 상대를 생각해야 하니 내 멋대로만 행동할 수 없다. 해가 지날수록 체력이 갈수록 허접해져 여러 군데를 둘러보기 귀찮기도 하고,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이 바뀔 때가 많다. 이처럼 혼자 떠날 땐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내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홀로 떠나니 일몰을 위해서만 반나절을 쓸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그냥 쭉 바라봤다. 그때만큼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모든 생각들도 싹 비워졌다. 그저 고요함과 완전함만이 존재했다. 무언가의 본질 그대로를 마주한 느낌도 들었다. 24년을 살며 처음 한 경험이었다. 현재를 체험하는 당시에도 나중에 이 순간을 오래오래 추억할 것 같다는 직감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은 짧지만 기억 속엔 어쩌면 영원히 기록된다.
친구랑 전화하며 수다 떨다 내려야 할 역을 놓쳤다. 통영은 또 버스 정거장 간 거리와 배차 간격이 길다.그냥 걸어가야지 생각하며 걷다, 몇 정거장임에도 거리가 만만치 않단 걸 느꼈다. 그렇게 우연히 한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게 됐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엔 마침 노을지는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그만큼 따뜻한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여행지에선 예상치 못했던 우연의 순간이 오래 각인되는 것 같다. 예측할 수 있다면 뻔하고, 뻔한 건 재미없다. 모든 게 처음이고 혼자니 설레고 두려우면서도 재밌었다. 택시 기사님과 조잘조잘 대화마저도 즐거웠다. 서울에서 택시 탈 땐 창만 보고 목적지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곤 했었는데.. 요새 통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기사님도 대화가 즐거워 보이셨다. 또래만 한 아들이 있는데 나를 보니 생각난다 하셨다. 나중엔 아들도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 하셨다. 아들 소개해주려 하실 만큼 내가 맘에 드셨나보다 (ㅎㅎ깔깔)
모든 게 만족스럽고 행복하니 주위 사람들한테 더 잘해야지란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의무적인 게 아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거.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신기했다. 자신을 더 깊게 이해하고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느꼈다. 혼자만의 시간은 주위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줬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런 거창함까지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매번 색다르고 다양한 생각거리들을 던져주었고, 지금까지 나를 이루는 부분부분에 분명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다음 주, 또 떠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