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을 내린다.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맞댄 나무들 사이로 산들 불어와 볼을 간질인다.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라디오 주파수에서 낯익은 노래가 흐른다. 추를 인 듯 무겁게 치솟은 어깨는 부담을 떨구고 긴장한 세포들은 바람을 타고 맥 놓아 일렁인다. 푸른 달이 뜰 때처럼 어쩌다 맞는 소중한 오후다. 때로 완벽한 순간은 복잡한 일상 속 찰나의 순간으로 무심히 반짝이며 짧은 위안을 선사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 덜덜거리던 나의 SUV와 함께 했더라면 온전함의 순도가 이만하진 못했을 텐데 간질이는 바람과 나부끼는 나뭇잎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아마 소리 없이 조용한 나의 세단 때문이다.
3년 전 차를 바꾸고 싶었던 나는 갖은 아쉬운 소리로 남편의 동정심에 애련이 호소해 할부도 끝나지 않은 그의 차를 운 좋게 넘겨받았다. 차 좀 바꿔 주십사 간청하던 나의 절절한 호소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른하늘 선물처럼 나의 세 번째 자동차-점잖기 짝이 없는 하이브리드 세단-가 조용히 내게로 왔다. 원래 차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 무렵 친정이며 대학원, 라디오 방송국과 강의 장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느라 시종 바빴던 나는, 발이 땅에라도 닿을 세라 덜덜거리는 내 흰색 SUV를 여기저기 휘뚜루마뚜루 몰고 다니며 분주하게도 다녔었다. 고속도로 시내 도로 가리지 않고 하도 달려 댄 탓에 연간 주행거리가 2만 킬로미터도 넘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어디 몰래 영업이라도 하고 다니는 게 아니냐며 기름값은 벌고 다니냐며 한동안 비웃적거렸다. 이렇듯 별반 소득 없는 일에 몹시 분주했던 시절을 몇 년 보내다 보니 디젤차 특유의 소음과 진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운전 속도 또한 빨라져 내 차는 레이서의 차 마냥 길이 날대로 난 터였다. 조금 과장해 비라도 오는 날에는 아슬하기 짝이 없어 핸들을 조금만 꺾어도 좌우로 휙휙 치우치며 가끔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서툰 실력으로 올케에게 산 첫 차를 마구잡이로 몰다 처분한 후 남편의 업무용 SUV를 넘겨받은 지 3년쯤 지나던 때였다. 꺾어지는 나이처럼 우중중한 외형에 덜덜거리던 소음이 지겹기도 했거니와 생기 잃은 거죽의 쪼그라드는 모양새를 세단의 품격으로라도 높여볼세라 차를 바꾸겠노라 노래를 부르던 나의 주창이 얼결에 결실을 맺은 때였다. 그렇게 운 좋게 나의 세 번째 자동차, 소리 없이 조용한 하이브리드 세단은 중년의 신사처럼 말없이 점잖게 내게로 와주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차는 남편이 내게 덜덜이 SUV를 하사할 즈음 시절의 변곡을 함께 하려 오랜 숙고 끝에 선택한 차종인데 그 무렵 테슬라에서 전기 자동차를 선보이며 업계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던 터라 어떤 차를 구매할지 결정하는 데 있어 적잖은 고민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는 배터리 충전도 쉽지 않았거니와 새로운 전기차가 막 업계의 문을 열고 태동한 지라 어설프게 얼리 어답터 흉내를 내며 신차 시장으로 매끄럽게 진입하는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흔을 훨씬 넘겨 다음의 고지로 바쁘게 내달리던 우리 부부는 신문물을 습득해 시대를 견인하는 선구적 삶을 살지도 않았거니와 충만한 도전 정신으로 과감히 시대를 찢고 나아가는 우월한 부류의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탄소 배출을 제한하는 친환경적 기조는 부인할 수 없었고 배터리를 사용해 전기로 굴러가는 자동차들도 심심찮게 도로 위에 등장하던 바, 이러한 전환적 시류 위에서 자연스레 우리의 하이브리드 차량은 선택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4차 산업 혁명과 변화의 맥을 같이 하며 보조를 맞춰 가고자 고심하여 선택한 결과물이며 성가신 소음과 매캐한 매연의 향연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다음의 목적지로 진입하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 선택이 내 인생의 구간과 때를 같이 하며 하나의 메타포처럼 전환의 시대에 공존하고 있다. 첫 직업의 오랜 구간에서 몸을 비틀어 혼돈과 공허가 존재하는 새로운 시절의 웅덩이 속으로 힘겹게 발을 밀어 넣는 나와 결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 인생의 하이브리드 구간에서 말이다. 생계를 잇기 위해 여전히 업을 이으며 뒤죽박죽인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뭐랄까 이 일은 생업, 즉, 먹고사는 일 외에 내게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소멸 중인 현재의 산업이라고나 할까? 더 나아갈 방향과 의지가 결여된 메말라가는 산유의 땅이라고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 자체의 의미나 보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더 이상 내게 어떤 성취나 만족, 기대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나는 현재 이 일과 긴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다음 구간으로 온전히 진입하기 위해 느슨한 바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간질거리는 새 바람의 흥분을 몸소 체험하며 현재라는 시간의 끝을 잡고 질주하는 중이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나의 과거 시절과 나는 현재 속에서 조금씩 그러나 충실히 이별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편할 대로 편해져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 오래된 연인과 애써 웃으며 시간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시절의 끝 자락에서 환승을 준비하며 최대한 예를 갖춰 현재의 그를 뒤로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나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기로 마음먹었고 온갖 것들을 미련이 붙잡느라 유송한 세월을 더 이상은 반복하고 싶지 않기에 한켠에 미뤄둔 내일을 꺼내어 지금의 시간 속에 불쑥 집어넣으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비록 어색하게 몇 번 쭈뼛거리기도 하겠지만 한 번도 눈앞에 당당히 두지 못했던 일생의 설레는 대시를 나의 내일에게 해 볼 작정인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하이브리드 구간은 시절의 전환과 운명처럼 맞물리며 소리 없는 질주를 이어나가고 있다.
삐빅. 짧게 울리는 타이머 소리에 얼굴을 든다. 모니터 안으로 열의에 찬 학생들의 정수리가 눈동자처럼 반짝인다. 풀려둔 문항이 97번이 다다르자 번쩍 정신이 돌아온다. 오후에 서너 줄이라도 끄적거리겠노라며 무얼 쓸까 머릿속으로 궁리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든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익숙한 톤으로 정답을 불러주고 오답을 확인한 후 오디오를 맞춰 풀이에 들어간다. 시간이 맞아 잠깐씩 아르바이트처럼 하던 일이 굳어져 이제는 영락없이 직업이다. 아르바이트(Part-time job)와 직업(Job)의 차이란 무엇일까? 취업 준비가 덜 된 학생들이나 돈이 더 필요한 직장인들이 본래 직업 이외에 부업으로 한정적으로 하는 일이 아르바이트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것이 직업이라고 한다(나무위키). 지겨웠던 취업과 퇴사를 서른 중반 즈음 종료한 후 바로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섰으니 어느 것이 직업이었고 어느 것이 아르바이트였는지는 모르겠다. 서른 중반까지는 직업의 명칭이 주는 그럴듯한 허울의 무게가 사소하지 않았기에 여러 이름을 붙여가며 나름의 타이틀을 유지했던 것 같다. 교육 기획자에서 강사 트레이너, 기업 출강과 대학 강의를 이으며 면접 지도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라디오 디제이에 잠시 번역 활동도 하였으니, 그 시절 동안 비슷하나 조금씩 다른 직업군들을 거치며 열심히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썼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직업이 개인의 본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기에 유의미한 차원의 노력들을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런 노력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다.
개인적으로 햇수를 거듭하는 모든 인간, 특히 여성에게, 마흔은 매우 결정적인 나이가 아닐까 싶다. 이 지점이 인생의 큰 변곡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흔은 우리를 본격적인 노화의 세계로 밀어 넣으며 그간 누렸던 젊음의 환대에서 다소간의 좌절과 무관심, 냉대를 경험하게 한다. 그뿐이랴. 사십 춘기의 방황을 횃불처럼 가슴에 던지며 진정한 자유와 책임에 대해 곱씹게 하고 인생의 의미를 연거푸 게워 고뇌하게 한다. 그런 상념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방점을 이동시키며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어 생의 의미와 구조를 재편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시간을 거치며 더 이상 직업의 명칭과 생업의 확장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적한 삶을 사는 자에게도 애락이 있고 성공한 자의 삶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이전 중요하다고 여겼던 생의 가치와 잣대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모든 고유성의 집합체인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표준이 훨씬 의미 있음을 깨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유 또한 타인으로부터의 선망의 목적이 아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발현되기 위함임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오늘 유의미하나 무의미하고 무의미하나 유의미하며, 무명하나 유명하고 유명하나 무명한 자유의 삶을 꿈꾼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시대의 터뷸런스 속에서 시간을 가르며 자연스레 유영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시간과 시선에서 독립된 스스로를 환호하며 새로운 시절을 창출하며 꿈꾸고 있다. 매일 써내려 가는 나의 해방을 소중하게 만끽하며 마침내 정주행 할 앞날의 순간을 그리며 꿈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자락을 붙들고 있지만 매 순간 종말하고 생성되며 유의미한 호흡을 이어가고 있다. 내일의 도로 위에서 새로운 나를 타고 나아가는 꿈을 지속하면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이 혼재의 구간이 꽤나 정신이 없으면서도 리드미컬하다. 꿈과 현실의 환승역 사이에서 끊임없이 주정차를 반복하며 어수선한 출발을 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 불안한 희망이 불쾌하지만은 않다. 그 속에서 긴장과 환희를 즐기고 있음이다.
이렇듯 하이브리드 구간은 꿈꾸는 나의 현실이다. 모호한 현실의 실제 속에서 만들어내는 꿈의 시간이다. 아직은 저속으로만 전기 주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자동차처럼 과거의 영향력이 더 많이 잔존하는 구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바람은 불고 시절은 밝아오며 나의 생도 다음의 정점을 향해 조용히 나아간다. 눈을 스치는 포스터들과 손짓하는 한 줄의 공모문과 기회를 뿌려대는 열의에 찬 선전들이 내 꿈의 시절이 코 앞에 와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다음의 시간이 포문을 열고 있다고 환호하는 듯하다. 그래서 간질거리는 이 바람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따금 에워싸는 현실의 바람이 거세기도 하지만 폭풍 뒤 다시금 산들거릴 생의 미풍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우아하지만은 않은 이 구간의 주인이 되어 조금은 설레고 흥분된 모습으로 다음의 객을 맞이하려 한다. 꿈꾸지 말라며 나를 붙드는 무거운 손들을 뒤로 하고 소용돌이 같은 시간에 내 자락을 한 줌 펼쳐 결코 한 번도 멈춘 적 없던 생의 질주를 오늘도 이어가려 한다. 일렁이는 바람 너머 폭우도 볕도 있을 테지만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무지개 언덕을 그리며 희망의 바람을 쉬지 않고 써 내려가려 한다.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간절함을 가슴에 품고 싹이 틔워질 날을 기다리며 내일의 나를 꿈꾸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