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눈부신 햇살이 감은 눈을 뚫고 나를 깨운다. 나직한 음악에 찌뿌듯한 몸을 틀어 기지개를 켜고 곱게 간 원두에 물을 내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투둑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 토스트를 꺼내 아무렇게나 한 입 베어 물고는 늦은 밤까지 작업한 문장을 몇 개 고치고 기분 좋게 업로드를 누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독자들이 하나 둘 ‘좋아요’를 누르니 상쾌한 기분은 물론 아침의 리듬마저 달라진다. 모니터를 파고드느라 구부정한 어깨를 펴고 서둘러 환복 하고는 고층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익숙한 센터로 들어선다. 라운지 음악에 세포들이 춤을 추며 하루 길을 부추긴다. 오후엔 무슨 일을 할까? 설렘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완벽한 하루의 아침을 시작한다.
‘아! 감은 눈을 뜨고 싶지 않군.’
‘모닝 루틴이 이와 같다면 소설 속 주인공쯤은 내가 해야겠지?’
알람이 울리기 전 그를 깨우는 건 그의 몸의 생체 시계다. 길들여진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한 잔 걸쭉하게 걸친 늦은 밤의 수면에도 시계보다 더 정확히 잠을 깨우는 건 그의 몸에 새겨진 생체 시계다. 비몽사몽 중 튀어 오르듯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난 남편은 졸린 눈으로 냉수 한 모금 들이키고는 바로 욕실 행이다. 일어나야 되는데…… 침대에 누워 주문을 외며 아침부터 뭉그적거리고 있다. 냉장고 속 묵은 반찬들과 어딘가 빈약한 각종 재료들이 머릿속에서 뒹굴며 이 조합 저 조합으로 뭉쳤다가 해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충 빨리 나올만한 메뉴로 선택된다. 진짜 일어나야지! 그의 출근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시간이다. 깔깔한 입으로는 절대 출근시키지 않겠다는 알량한 아내의 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침 7시 40분. 오늘도 여전히 집으로 출근할 시간이다.
삶이 드라마처럼 꿈꾸는 대로 바라는 대로 살아진다면 좋으련만. 짧지 않은 세월을 산 나는 대부분 생의 시간이 그렇지 않음을 안다. 투둑 소리와 함께 갓 뱉어진 따끈한 토스트에 풍미 좋은 버터를 발라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며 판타지처럼 아침을 시작하고 싶지만, 나는 카페인을 멀리 해야 하는 사람 아니던가. 종일 굴려대는 머리 때문인지 각종 해프닝들을 스트레스로 둔갑시켜 쉽게 골몰하는 뇌 때문인지 2주에 딱 한번 디카페인 카푸치노 이상의 카페인 섭취는 자제해야 한다. 뇌가 과각성되어 머리가 떨리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침 요기 거리를 준비하느라 널브러진 주방을 외면한 채 거실 한켠을 평화롭게 차지하고 앉아 고상을 떠는 일도 내키지 않는다. 눈앞에 정리되지 않은 온갖 부유물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양제 한 줌 미온수에 털어 넣고는 자질 구례 어질러진 아침 풍경을 대충 정리하고 새벽처럼 아직 잠에서 덜 깬 느린 몸을 소파에 털썩 몸을 누이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그렇게 소파를 뒹굴며 온 몸이 잠에서 깨기를 한참. 이제는 커피의 힘을 빌지 않고 나를 각성시킬 시간이다. 볼품없는 트레이닝 복을 대충 추려 입고 갈까 말까를 수없이 외치다 겨우 운동화 끈을 묶는다. 1층 헬스장이 지겨워 오늘은 강변을 잠깐 걷기로 한다. 계절의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푸르른 아침이다. 얼굴이 바뀐 꽃들의 조용한 인사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정비되지 않은 머리 속도 나름의 질서를 찾는다. 현실 시간의 목록들과 꿈의 시간의 목록들이 갈래를 나뉘며 이번 주에는 약속을 잡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스스로에게 보이는 결의 정도 되겠다.
이대로 노트북을 챙겨 어디로 나가고 싶기도 하지만 딱히 적당한 곳도 떠오르지 않는다. 작업할 작은 스튜디오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텅 빈 대궐 같은(작자 부군의 서) 집을 두고 왜 작업실을 찾느냐는 남편의 말에 달리 대꾸할 말도 없다. 강아지도 없을뿐더러 나의 모든 개인 작업은 현재 궤도에 오르기는커녕 출발을 알리는 총성조차 없기에 이 시간은 누가 봐도 간헐적 백수의 시간이다. 작업용 사무실을 얻어야 할 공적인 명분이 없으니 그냥 집에서 창의적으로 뭉개기로 한다. 충분히 따분할 수 있지만 다행인 점은 전혀 심심하지가 않다는 것. 지나가는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다. 풀어진 분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생각을 했다가 말았다가 그림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골조를 세웠다가 무너뜨렸다가 집을 지었다가 부쉈다가 사춘기 소녀처럼 종일 설렐 수 있는 이유는 매일 이 흔한 풍경 속에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 매번 힘차게 동력을 입어 속도를 내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꿈은 내 생의 밑그림이며 설계도이자 계획이고 더불어 장차 현실이 될 현재의 이상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호’를 창출했다. 그래서 지금 ‘호’에서 출발하고 있다. 은주나 지영이처럼 흔하디 흔한 내 이름이 버젓이 있고, 이십 대 중반 무에 일이 풀리지 않았는지 작명소 할아버지 말에 홀려 대외적인 이름을 그럴듯하게 바꾼 데다, 업계에서 통용할 영어 이름까지 이름이 차고도 넘치는 나였지만(그렇다고 결코 유명한 것은 아니겠으나) 글을 쓰는 일에서만큼은 대부분 나의 존재를 몰라 주기를 원한다. 어중간한 지인을 포함해 드문드문한 동료들과 어색한 인맥들이 나의 존재를 쉽사리 알지 못했으면 한다. 관종이 넘쳐흐르는 자기 PR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는 결코 유명해지거나 이름을 얻고 싶지 않으며 그렇게 누군가의 이목을 끌며 의미 없는 눈 방아 입 방아에 오르내리기를 원치 않는다. 말하자면 나를 맘껏 내보이는 이 무한한 자유를 누군가에 의해 결코 구속당하고 싶지 않다. ‘호’는 그런 이유로 잉태되었다. 그러니까 ‘호’는 나의 글 쓰는 자아인 것이다. 지금은 본캐(본래의 캐릭터)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작업이 늘며 ‘호’는 부캐(본래 캐릭터 외 부가적인 캐릭터)가 아닌 본캐가 될 수도 있다. 뭐, 운이 없으면 나만의 왕국에서 홀로 주인공 놀이를 하다 마는 것이고.
꿈은 거기서 출발했다. ‘호’라는 이름을 지은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한다’, ‘좋다’, ‘좋아한다’라는 뜻의 ‘좋을 호(好)’. 좋은 게 좋지 아니한가.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호작(好作)’. ‘좋아하는 것을 만든다’, ‘좋은 것을 만든다’, 또 ‘호가 하는 작업’’ 정도.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은 경상도 방언으로 말하면 ‘호작질’ 정도 될 터. 결과가 볼 품 없으면 진짜 말 그대로 쓸데없는 장난질의 ‘호작질’이 될 것이고, 그럴듯한 창작물이 남게 된다면 ‘호’의 작업질’이 되어 유머를 머금은 나만의 고유 명사가 될 수도 있겠지. 재미나지 않은가. 짓고 부수는 것만큼 재미나는 일이 없으니 늦게 찾은 업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호작질’ 자체도 너무나 재미가 나는데, 이리저리 살펴보니 이미 자기만의 호작질 공간을 만들어 둔 사람이 많다. 작업물을 공유해 작업자들의 포트폴리오를 볼 수 있도록 열어 두기도 하고, 더러는 작업물을 제작해 파는 사람들도 있다. 어딜 가지 않아도 남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오다가다 아이디어를 줍는다. 주변을 수소문해 직접 만나려 했더라면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닿지 못할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연이라기보다는 SNS 탐색을 통한 우연한 만남에 더 가까우리라. 그러나 의도치 않은 우연한 만남의 반복은 필연적 우연 아닐는지. 이만하면 내 운명의 줄이 나를 나아가야 할 곳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나는 하늘을 믿으니 맘 속에 믿는 구석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호’는 조금 더 꿈의 판을 키우고 싶어졌다. 바로 ‘호작당’을 짓고 싶어진 것이다.
‘호작당(好作當)’은 말 그대로 ‘호(好)’가 ‘작(作)’을 하는 ‘당(當)’이다. 뭐, 우스개로 풀면 ‘호작질을 하는 집’도 되고, ‘좋아하는 작업이 모여 있는 공간’도 된다. 좋아하는 작업이 무어냐고 정의 내리라고 한다면, 음, 지금은 글쎄… ‘아직은 다소 미정입니다’라고 궤변처럼 답해야겠지만, 어딘가 온라인에 나의 개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 하나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고 나의 작업물들이 모이면 그 아이들의 집으로 삼아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물(物)’을 셀렉해 모아 두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 지금은 딱히 무어라 정의를 내리기 곤란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는.
그래서 형체가 없는 이 비실물적 비전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나는 매일 나의 사랑하는 집에서 하고 있다. 내 머릿속 창작의 공간 호작당이 내가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TV를 보는 이 평범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호가 하는 모든 호작질이 이 베이스캠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줌으로 종일 수업을 하고 하루는 아버지의 수술을 쫓아 서울과 대구를 이으며 하루는 겨우 작심 한 달 만에 글을 쓰고 있는 이 공사 다망한 공간이 어쩌면 나의 현재 호작당일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곧게 질서를 세울 수 없는 어수선한 이 공간이 내 꿈의 현상소일지도 모르겠다. 불어오는 태풍처럼 생의 한가운데 모든 일들이 쓰나미처럼 엉켜 몰리고 있음에도 한 줄기 빛을 잃지 않은 오로라가 때를 기다리며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꿈에 그리 듯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지길 기다렸지만 내 인생에 그렇게 완벽한 순간은 쉽사리 와주지 않는 듯하다. 정확한 순간에 모든 것을 접고 꿈 하나에 몰두하길 바랬지만 삶은 그렇게 딱 떨어지는 방정식이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생은 힌트를 준다. 매일 집으로 출근하는 어수선한 시간일지라도 그때는 멈출 때이며 지금은 나아갈 때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눈물로 뿌린 씨앗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이제는 눈앞에 널브러진 이부자리에도 아랑곳 않으며 쌓인 설거지 거리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식탁 위 뒹구는 피자 조각에도 산만해지지 않는다. 뭐, 가끔은 정신을 성가시게 하겠지, 생활과 꿈이 묘하게 부딪혀 데칼코마니처럼 공존하는 이 공간에서 나는 무사의 검처럼 예리하게 펜을 들고 순간을 집어 올려 똬리를 틀고 내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어제는 이것이 되었다가 오늘은 그것이 되었다가 내일은 무엇이 되기나 할까 미로를 헤매던 나에게서 진화해 힘 있게 획을 긋고 형체를 만들어 내 꿈의 집을 비로소 세워나간다. 그렇게 내 꿈의 베이스캠프로 오늘도 출근해 인부 하나 없는 더딘 환경 속에서 차곡차곡 벽돌을 쌓고 있다. 꿈이 무르익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출근해서 말이다. 현실과 이상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나의 아름다운 집.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