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Jan 25. 2022

낚은 것은 괴물, 건져 올린 것은 나의 묵인

[명작 다시 보기] 영화 '괴물'이 말하는 진짜 공포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작 다시 보기]에서는 이전에 본 비교적 옛날 영화를 다시 본다라는 의미(再)와 '어, 너 다시 봤다?'라는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보다'의 의미(異)로 글을 남기려 합니다.




#1, 한강


*괴물 사진 주의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괴물'

먼저, 영화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인 '괴물'. 이 괴물은 양서류와 어류의 모습을 띄고 있다. 왜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영화에서는 첫 시작에서 설명한다.


먼지가 싫은 미국인 상사. 그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 군무원은 사용 기간이 지난 대량의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으로 방류하게 되는 장면.


 영화에서는 노골적으로 괴물 출현의 원인을 밝히고 있다. 미국인 상사는 먼지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독극물인 프롬알데히드를 무단으로 방류하라고 명령하고, 이에 한국인 군무원은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갈색 병에 담긴 프롬알데히드를 버리게 된다. 그렇게 괴물은 한강에서 태어난다.


서치를 통해 찾을 수 있었는데, 2000년대에 실제로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한미관계의 급속한 악화로 주한미군의 철수 논란까지 이어지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괴물’ 영화는 ‘미국’이 ‘괴물’을 만든 장본인이자, 이를 없애는 해결사로 등장시킨다. 또한, 관련된 모든 지식과 정보,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배계층에 위치하여 권력을 독점한다. 비로소 ‘괴물’이 나타남으로써, 침략 주의적 이면이 드러난다. 그 아래 희생양인 독극물을 방류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자는 한국인이며, 희생되는 정보 조사원 또한 한국이다. 반면, 한국의 정부는 단 한 번도 한강에 나타나지 않는다. 지시하고 결정하는 미국 아래, 주체성을 잃어 따르기만 하는 한국인과 보이지 않는 정부의 모습은 ‘공포’의 감정을 슬며시 얹는다.


 영화 속 정부는 한강에서 나타난 이상한 물고기 그리고 이후 나타난 괴물의 존재에 대해 어떠한 개입이나 대책이 없다. 외국인들의 눈에 아이러니할 뿐인 ‘합동분향소’만 마련해준다. 눈물에 젖는 흑백 빛 분향소는 차갑고 냉담하다. 분향소마저도 정치인들의 겉치레뿐인 인사 자리가 되었고, 정작 시민들의 안위와 소통에는 관심이 없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한 공무원은 막상 상황 설명에 대한 질문을 받자, 텔레비전에 다 나온다며 다급하게 채널을 넘겨보지만 찾지 못한다. 재난 영화의 뻔한 클리셰 중 하나인 TV를 틀면 나오는 재난에 대한 정보. ‘괴물’ 영화는 이것을 한 번 비틀어버리면서 무능함을 극대화한다.


방역 활동을 감시하는 한강의 구청 직원은 방역 활동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자신의 뒷주머니를 채우고,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 노인은 자신의 배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날카로운 사회에 위협당한다. 이들을 뒤로하고 결국 혼자 어둠뿐인 미지의 동굴 속으로 걸어가는 ‘강두’를 통해 안전한 사회와 정부 역할의 부재와 무능함이 ‘공포’의 감정을 더 극대화한다.



*괴물 사진 주의

괴물의 운둔지는 바로 서울의 '한강'이다.


 ‘괴물’이 사는 다리 밑 ‘한강’은 이중성의 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곳이다. 급속한 경제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대기업의 높은 담장과 같은 건물들은 바로 옆 골목의 작은 세탁소에 햇빛 하나 들지 못하게 만든다.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미처 보이지 않는 작은 세탁소처럼, 한강 물아래에 저변에는 이 영화가 만든 ‘공포’에 의해 잠든 시체가 깔려있을지 모른다. 하수구의 더 깊은 곳,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마다 ‘괴물’이 뱉어내는 시체의 수는 늘어나고 결국 무엇인지 모를 섞인 유골들을 뱉어낸다. 그렇다. 유골들을 막 토해낼 때, 영화 시작에서 보았던 한 직장 상사가 한강 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이 장면이 오버랩된다.


 한강의 저변에는 견디지 못한 시체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에 좌절한 사람이 내던진 장소는 한강이었고, 그들이 각박한 사회 속에서 이겨내고자 소박하게 즐겼던 작은 맥주 한 캔은, 마치 괴물이 조롱하듯 마지막에 '툭' 하고 뱉어낸다.


‘괴물’은 더 아래로, 아래로, 깊숙하고 어두운 하수구 속에서 급속한 경제의 성장에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구석진 이면의 결과를, 토해내듯 뱉어냈다.



#2, 소통의 단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언론’은 ‘괴물’의 존재를 ‘바이러스’라는 공포의 존재로 극대화한다. 언론은 사회에 위협이 되는 진짜 공포 대상인 ‘한강의 괴물’을, ‘강두 가족들’로 보도한다. 그들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사회 속에서 낙인찍어버린다. 양궁선수 ‘남주’의 악수하는 장면은 왜곡과 억압이 얼마나 쉬운지 보여준다. 언론 왜곡의 위험성, 그 자체로도 ‘공포’다. 결국 영화의 끝에서 '강두'는, 밥을 먹으며 티비를 발로 꺼버린다.


 영화 ‘괴물’은 보이지 않는 사회의 이면을 마주치게 하고, 지각하게 하고, 괴물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직접 대면하게 한다. 평소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더 아래로, 깊숙하고, 어두워서 눈치채지 못했던 사회의 이면을 수면 아래에서 끌어올려 더 위로, 더 밝은 곳으로 내 던진다.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일어난 환경오염, 외면되는 시민의 외침, 침략 주의, 정부의 무능함, 언론 왜곡의 위험성,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 계층구조로 인한 소통 부재.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 투신자살을 했던 사람은 물속에 검은 것이 안 보이냐며, 동료들은 이에 안 보인다는 말을 듣자,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 잘 살아들.'라고 말하며 한강으로 몸을 던진다.


검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괴물일까? 그렇다면 괴물은 우리의 묵인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닐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그 존재를 통해 우리의 묵인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영화이다.






작가의 이전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