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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24. 2022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

[명작 다시 보기] 영화 '그래비티'가 제시하는 존재의 정의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작 다시 보기]에서는 이전에 본 비교적 옛날 영화를 다시 본다라는 의미(再)와 '어, 너 다시 봤다?'라는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보다'의 의미(異)로 글을 남기려 합니다.




그래비티, Gravity (2013)

영화 그래비티는 2013년에 개봉한 SF 영화이다.

우주를 잘 담아낸 SF영화는 그 자체로 경이롭고 고요한 체험을 하게 된다.



1. 존재한다는 것


 영화의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 그녀는 우주에서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한다.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딸을 잃고 삶에 대한 감흥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조용한 라디오를 들으며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마치 고요하고 공허한 우주처럼.




 지우개는 '지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우기 위한 '본질'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지우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지우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운다'라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지운다'라는 본질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우개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본질이 먼저가 아니다. 실존한 다음, 인간이 의지와 선택이라는 자유를 통해 목적이라는 본질을 만들어 낸다. 인간만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장 폴 샤르트르의 말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세계에 내 던져진 존재로, 실존 후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인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무의식 상태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질 수 없다. 의식하고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는 자만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기까지 끊임없는 선택에 직면한다. 그 선택에 따라 삶의 본질이 만들어진다. 샤르트르는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본질을 구현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그래비티는 '존재한다'라는 것을 정의한다.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 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암흑과 죽음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 우주 미아가 되어 아무런 의지 없이 죽어가는 것과 같다. 그녀는 존재하고 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드 넓은 우주 속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연속적으로 부딪혀오는 위험들에 가까스로 살아남으면서 그녀는 '죽음'에 가까워지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동료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의 죽음을 마주하려 할 때 그녀는 삶에 대한 본질을 깨달으며 다시 태어난다.


삶의 본질을 깨닫고 실존적인 인간 '라이언'의 탄생


 그녀는 더 이상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다.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하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고 나아가는 인간이다. 선택하고 그 선택에 스스로에게 책임지며,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디디며 살아가고자 한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나아간다. 스스로 주어진 자유의지에 의해 자신의 본질을 찾고자 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



2. 죽음


 그녀는 '죽음'을 통해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다.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행복'에 대한 고찰은 쉽게 이루어지지만, '죽음'에 대한 고찰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음과 반대되는 '생존'은 생물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겐 외면하고, 회피하게 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고찰은 오히려 삶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줄 수 있다. 생존과도 직결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현재,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익히 다가오는 것이고 그것을 언제 마주할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다. 적당한 '불안감'은 사람에 있어서 더 나아가는 힘, 일 잘하는 사람에겐 적당한 '불안감'은 필수적인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이 없다면, 그 사람에겐 코로나19에 감염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교통사고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사람에겐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다. 부정적 단어를 조금 새롭게 받아들일 때, 더 넓은 세상이 보인다.


 죽음의 앞에 섰을 때, 나는 후회 없이 살았는가? 나는 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삶을 살았는가?


 지금 당장의 나는,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가? 자문하게 되는 영화, '그래비티, Grav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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