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볼수록 선연해지는 건 사람, 사랑
모든 것은 바깥에서 왔으니까
본가로 내려갈 예정이 없었다. 급하게 내려가게 된 것은 깊이 아끼는 후배가 삶을 헤매고 있단 소식을 듣고 난 후였다. 그는 하루에서 반나절을 더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어났다. 수많은 감정이 몰아치다가도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났을 때는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만 앞섰다. 다행이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직접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라는 마음이 스몄다. 그러곤 두서없는 내 진심을 전했다. 주책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훌쩍, 면회도 훌쩍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동생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편의점의 카운터에 앉아 보니 곳곳에 설치된 CC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컵밥 하나를 계산하고서 얼마나 데워야 하는지 여쭤보시는 손님 한 분. 알려드렸더니 숟가락을 찾으셨다. (왜 컵밥에 숟가락을 안 넣어두는 겨?) 하지만 편의점에 배치된 숟가락이 다 떨어진 모양. 결국 요거트용 숟가락, 그거라도 달라고 하시더니 비가 멈출 새 없이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묵묵히 식사를 하셨다. 이후 레쓰비 하나를 계산하시고 밖으로 사라지셨다. 또, 레쓰비는 언제 1,200원이 된 걸까. 새삼 오른 물가가 실감 났다.
그가 비운 자리엔 미처 치우지 못한 빈 용기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라졌던 그 손님은 바깥에 배치된 벤치에 앉아 담배 하나, 레쓰비 하나로 빗줄기를 채우고 계셨다.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도 아닐 수도 누군가의 남편일 수도 아닐 수도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기도 한, 그 사람의 모습 뒤로 희미한 외로움이 보였다. 나는 잠시 눈을 거두고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 역시, 소리 없이 사라지셨다. 벤치에는 빈 담뱃갑과 레쓰비 캔을 남겨둔 채. 남겨둔 흔적들에는 어쩌면 외로움들이 자리해 버린 건 아닐까. 뭉툭한 비는 계속 내렸다. 나는 으레 피워둔 오지랖을 접고 그런 날은 어째선지 한시도 가족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다음 날 맑게 갠 하늘은 유난히 예뻤다. 햇살에 부서지는 나뭇잎은 쏟아짐 이후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반짝임. 나는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 위에서 분명 수많은 사람들과 있었음에도 늘 그랬듯 사람들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달랐다. 헤드셋을 낀 채 신나는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통 걸어가며 뛰면서도 걷다가, 카드를 찍고 한 바퀴 턴을 돌더니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는 사람. 잠시나마 지하철이 그를 위한 광고판이 되었다.
나는 그 사람을 처음 보았지만 그를 신나게 한 어떠한 노래와 그의 주체하지 못하는 흥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있다'라고 인식했다. 분명 우리는 지하철 안, 버스 안, 도로 위, 카페, 편의점, 식당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친다. 같은 공간에 머묾에도 우리는 그 공간에 있는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저 '보는 것'에 의해서 모든 존재를 알기란 어렵다. 뇌의 공간은 너무 작으니.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기억 속에 두는 존재가 있다. 부모님.
태어난 이후로 온몸의 세포들은 생존을 향해 살아간다. '나'라는 존재는 관념 속에서 태어났다. 내가 '나'라고 인식하는 것도 나를 '나'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나'라고 인식할까? 우리의 뇌는 나의 이름을 부여해 주지 않는다. 나를 '나'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결국 지금 살아가는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시작되고 부여된다. '나'라는 존재는 나의 관념 속에서 살아있다. 나는 내가 '있다'라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생각하면 비교적 결론에 쉽게 달할 수 있다.
결국 모두 바깥에서 왔다. 내면에 집중하다 보면 '순간'에 대한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미래보다 그 사람과 현재 쌓아가야 할 '순간들'이 더 깊게 와닿는다. 관계 속 쌓이는 순간들이 뒤에 일어날 미래보다 중요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순간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그렇다. '있다'라는 건 바로 이런 것. 무엇이 더 중요한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자전거 체인에 기름칠을 해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