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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할머니

우렁할머니는 누구?

by Kidcook

어제는 퇴근 후 집에 왔더니 현관 앞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어, 누가 왔다 갔나?' 하는 생각에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건조기에 있던 모든 빨래들이 거실에 가지런히 개어져 있고, 가방을 내려놓고 혹시나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저께 사둔 수박이 사라졌다. 대신에 큰 반찬통 여러 개에 잘라진 수박들이 가지런히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묵볶음 한 통과 코다리조림 한통이 함께 나란히 놓여있는 게 아닌가.


주말 내내 컨디션 난조로 침대와 소파를 번갈아 이동해 가며 널브러진 빨래처럼 쓰러져 있다가 주말을 다보내고 나니 건조기엔 빨래 한가득, 현관문 앞엔 신발들이 한가득. 냉장고에는 커다란 수박이 한편을 다 차지하고 있었건만. 우렁 할머니가 다녀가시고 나선 집안이 한결 정리정돈되어 있고, 하기 싫어서 쌓여 있던 집안일들이 해결되어 있다.


이건 누구의 아름다운 소행일까. 두구두구두구. 바로 다름 아닌 친정엄마의 발자취이다. 도보 15분 거리에 사시는 친정엄마께서 주말에 통화하면서 피곤해서 운동도 안 가고 쉬고 있단 말에 월요일이 되어서야 딸이 없는 틈을 타서 다녀가신 거다.


손주가 좋아하는 코다리조림과 사위가 좋아하는 어묵볶음을 한통씩 해서 들고 냉장고에 넣어두시고, 빨래 한가득 들어있는 건조기를 열어보시곤 그 많은 빨래도 다 개어두시고 간 우렁할머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딸 힘들다고 자주 오셔서 집안일을 해주고 가시곤 했는데, 요즘은 아주 가끔 볼일 있을 때만 들르신다.

사실은 어느덧 아이들도 다 크기도 했지만, 한 번은 엄마가 몰래 오셔서 설거지며 청소며 해주고 가시는 게 너무 속상해서 엄마한테


내가 할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집에 와서 집안일하고 가지 마세요. 엄마가 딸 둔 게 무슨 죄에요?


하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엄마도 그 담부턴 아무도 없을 때는 잘 안 오신다.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고맙단 말 보다 퉁명스레 하는 말에 엄마도 속상하셨을 테다. 괜히 집안일 도와주고선 투박만 듣고... 시어머니는 오시면 그냥 놀다가 얘기하고 가시는데, 엄마는 오시면 계속 뭔가 집안일해줄 게 없나 하고 보시면서 현관문에 먼지라도 닦아주고 가시는 걸 보니, 그날은 너무너무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엄마도 우리 집 오시면 그냥 딸이 해주는 밥 먹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얘기만 하고 놀다 가세요.


그러고 나선 내 마음이 좀 편해지긴 했지만, 그 이후론 엄마가 오셔서 뭘 도와줄라치면 내 눈치를 보신다. 그러면서 '이거 좀 해줄까?' 하시는데, 또 그것도 보기가 싫다. 암튼 그냥 해주셔도 마음이 안 편하다.

친정엄마와 나의 영원한 숙제인 건가.


손가락이 아파서 퇴행성관절염 진단받아서 약도 먹고, 양쪽 팔에 테니스엘보와 골프엘보 진단을 받아서 병원을 일 년 넘게 다니면서 치료를 받고, 갑상선암으로 수술까지 한 딸이 엄마는 한 없이 미안하고 안쓰러우신 것 같다. 엄마 탓이 아니라고, 내 성격에 몸 안 아끼고 일 많이 해서 아픈 건데 어쩌냐고 해봐도 부모 마음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몰랐으리라.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자식 입장에서 부모가 죄인인 것 마냥 그렇게 하시는 것도 너무 속상한 건 어쩌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이 영원한 도돌이표 같은 느낌이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나,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양적으로 같을 수는 없겠지만 방향은 한 방향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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