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 창고

빈곤 포르노인가? _ <가버나움>

나딘 라바키, 2018

by 김민준

감상을 마치고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픈 영화가 있다. 홀로 씨름하더라도 나름대로 정리하려는 편이라, 그 이유가 영화의 난해함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태도에 대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어서인 것 같다. 정확히 <가버나움>이 내게 그런 궁금증을 안기는 영화였다. 2022년 8월, 이 영화를 뒤늦게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모큐멘터리로서 분명한 성취가 있다는 입장과, 빈곤과 궁핍을 전시하는 포르노라는 입장이다. 만듦새를 두고 견해가 갈리는 건 아닌 듯하다. 뛰어난 완성도는 오히려 이 영화가 논쟁을 일으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니까, <가버나움>을 둘러싼 논쟁은 영화의 당위에 관한 것이다. 현실 앞에 영화는 어떠해야 하는가. 언젠가 한 번쯤은 짚어야 할 이 질문이 <가버나움>을 문득 통해 솟아올랐다.

<가버나움> 스틸컷


현실을 학대하는 영화와 아닌 영화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는 오늘도 어디선가 제작되고 있을 것이다. 영화가 반영의 현실이라지만, 예술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는 이야기를 담기 참 훌륭한 그릇이다. 당장 생각나는 몇몇 영화(<고스트 스토리>, <지구 최후의 밤>)처럼 시적 리듬을 체현한 작품을 제외하면 보통 영화의 이미지 위에는 이야기가 쌓인다. 그리고 결국, 이 속성은 시나리오가 사회로부터 결별하지 못하게끔 끌어당긴다.


<가버나움>뿐만 아니다. 장르 영화라고 할지라도 사회와의 연결은 불가결하다. 근래 국내에서 코미디 장르에 충실했다고 호평받았던 <극한직업> 또한 일면에선 사회 맥락과 닿아 있다. 이를 배제하고도 여전히 웃을 수 있을까. 도대체 장사가 왜 잘 되느냐는 영호(이동휘)의 호소나, 씻고 오겠다는 아내의 말에 당황하는 고 반장(류승룡)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는 건 그 장면에서 현실이 보여서다. 다만 장르적 요소로 승화한 까닭에 과도한 해석이 차단됐을 뿐이다.

<가버나움> 스틸컷


결국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그 연결을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때에 따라서 물꼬를 좁히거나 넓힐 수는 있을 테다. 이 성취가 두드러지는 영화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이 영화의 션 베이커 감독은 사회와 영화의 연결점을 정확히 포착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세상을 비추는 창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좁힌다. 쇼트 대부분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이들의 시선으로 목도된 플로리다의 전경은 밝고 찬란하다.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는 이들의 삶 역시도 아이들의 시선을 거쳐 전해진다. 그 이질감이 아이러니하고도 각별한 <플로리다 프로젝트>만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사려 깊은 영화를 얘기할 때 여전히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거론된다. 정리하자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매체를 통해 현실이 굴절될 수 있음을 외면하지 않는 편의 영화다. 그래서 세상을 온전하게 재현하려 들지 않는다. 되레 굴절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다. 기꺼이 '어떤 굴절'이 될 것이냐고 자문하고 자답한다. 카메라가 아이들의 시선에 위치하는 건 그 결과다. 글쓰기에서 펜이 주관을 가지듯,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주관을 가진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그 주관을 기꺼이 아이들에게 일임하고,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 이들을 이해하려 한다.


현실을 학대하는 영화는 대개 그 대척점에 있을 것이다. 사회가 영화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 예컨대 카메라나 편집의 용도를 고려하지 않는 영화가 여기에 속하겠다. 무엇이든 선의였겠다마는, 그 결과물은 결국 현실을 본떠 만든 가짜 세상이다. 이렇게 영화 양식의 권능을 잊은 채 실상을 나열하기만 한다면 작품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스타일과 문법이 현실을 소비하고 가학적으로 전시하는 비극은 대개 여기서부터 연원한다.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은 빈곤 포르노인가.


<가버나움>에게 드리운 오명 역시 다르지 않다. <가버나움>은 매체의 권능을 빌려 세계를 전시하는 쪽인가,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굴절을 떠안고 세계를 비출 방법을 모색하는 영화인가. <가버나움>을 두고 유독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선택한 연출 방식이 모호하게 보일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달리 현실과 영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부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격랑을 영화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인물의 서사가 집중적으로 조망돼 비애가 부각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를 두고 가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부각된 비애가 어떻게 승화하는지가 요점이 될 것이다. 어디선가 대뜸 나타난 구원자는 되레 이들의 주체성을 앗아가기만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세계 내에서 종결돼야 한다. <가버나움>은 기어이 그렇게 자인의 이야기를 맺는다. 그래서 차라리,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던 삶의 질곡을 좇으려 했다고 보는 편이 나을 테다. <가버나움>은 위태로운 삶의 경로를 두 차례 반복하여 보여준다. 한 번은 어머니와 아버지, 다른 한 번은 자인을 통해서다. 포르노라기에는 이 영화가 빈곤을 포착하는 방식이 나열적이지 않다.


‘자인’이라는 중동의 소년이 주인공이다. 소년은 어떤 연유로 자기 부모를 고소하게 됐을까. 영화가 제시하는 첫 장면은 자연스레 관객들에게 의문을 안긴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하려는 듯, 교차편집을 통해 소년이 살던 동네 전경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부감에도 다 담기지 않는 도시를 한참이 머물던 카메라의 시선은 골목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에게로 옮아간다. 이 도시에, 이 아이들 사이에, 자인이 있다. 영화는 n분의 1 만큼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주인공 자인은 그 n에 해당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영화는 자인에게 곧장 시련을 안긴다. 그가 제일 아끼던 동생 사하르가 몸값을 받고 조혼을 가게 된다. 이후 자인은 집을 떠나 거리를 방랑한다. 그를 받아주는 건 에티오피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라힐이다. 나름 안정적으로 꾸려지던 이들의 삶은, 라힐이 불법체류자로 억류되면서 꼬여가기 시작한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자인은 가구를 팔아 음식을 구한다. 그러다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내쫓기게 되고, 자인은 라힐의 아들인 요나스를 넘겨달라는 아스프로의 제안을 승낙한다.


n분의 1 만큼의 삶. 그 뒤에는 n분의 1 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가버나움>은 그 책임의 범위에 대해 말하려는 영화다. 그래서 요나스를 품게 된 자인이 자기 부모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걷게 한다. 자인은 요나스의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얼음에 설탕을 묻혀 먹인다. 어머니가 그랬듯, 약국에서 받은 약을 빻아 물에 섞고 음료로 판다. 끝내 그는 요나스의 발에 사슬을 채우기에 이른다. 단지 자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는 게 아니다. 마음을 울리는 건 자인의 처지가 아니라 그가 갖는 책임의 크기다.


동일한 이야기가 거듭되는 서사는, ‘그러했다’는 감상으로 끝나게 두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그럴 수밖에 없던’ 필연적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복기해야 한다. 두 부모의 모습이 상기되며 자인과 대조를 이룬다. 고리를 끊어낼 의지가 있냐는 게다. 중단하지 않으면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것이다. 이 영화가 마음 쓰는 곳은 거기에 있다. 그렇게 '적어도'를 남긴다. 잘 살 수 있는 최대치를 말하지 않고 주지 않는다. 벗어나기 위한 최소의 의지만을 되뇐다.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의 이미지 위에는 이야기가 쌓인다. 그 이야기가 너무도 처연해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이 영화는 인물의 자아를 해치지 않는다. 이들의 빈곤은 다른 누구를 위해 전시되지 않는다. <가버나움>의 카메라는 자인을 구석으로 내몬 적이 없다. 자인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다. 한편 <가버나움>에선 어른들 앞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당당해져야 했던 자인을 감상적으로 다룬 일도 없다. 그런데도 보는 내내 괴로운 이유는 그 책임이 계속 전이되고 계승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어디선가 끊어져야 한다. 이 영화는 날 선 태도로 책임 당사자를 눈여겨본다.


근래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가 연일 뉴스를 뒤덮었다. 마침 이 원고를 브런치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한 직후였다. 노트북 영화 리뷰 폴더에 수북이 쌓여 있는 원고 중 하나가 대뜸 생각났을 뿐이다. 절묘했다. 의도한 게 아니기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냐마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연극에서 공여자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처받는 쪽은 사진으로, 영상으로 말미암아 이유도 모르는 채 처절해진 쪽이다. 수혜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사람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짜릿한 꿈, 저릿한 삶 _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