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영화 창고

짜릿한 꿈, 저릿한 삶
_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

발렌티나 마우렐, 2022 (27th BIFF)

by 김민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여성 서사로 비튼다면 어떨까. 융이 정리한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지만, 주류 영화의 서사로서는 비교적 소외받아 온 모티브다. 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경향이 근 수년간 이어져 왔음에도 유사한 시도가 없었다는 점은 의아한 대목 중 하나다. 그간 저항 서사가 각광받아 왔다면 이제 대안 서사로서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되지 않았나.


내겐짜릿한꿈이있어3.jpg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 스틸컷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는 용케 이 과감한 시도를 해내는 영화다. 벨기에, 코스타리카 등 다양한 국가에서 협업한 제작 과정 덕일 수도 있겠다. 이 영화에서는 국가를 특칭 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짐작되기는 한다만, 사회적 문제와 결합해 작은 보편을 이끌어내는 구조화와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바깥으로 확장될 수 있을만한 여러 갈래를 에바와 마틴이라는 인물의 내적 세계로 수렴시킨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전개는 돌출적이지 않은 편이다. 인물에게 시련을 안기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고루할 만큼이나 성실히 따르고 있다. 딸 에바가 아버지 마틴과 집을 구해 함께 살아가려 한다는 줄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끼어드는 인물들은 주변적이다. 에바 혹은 마틴의 감정을 끌어올리거나 구체화하는 메타포로서 역할을 한다. 남는 건 마틴-에바라는 단일한 인물 구도다.


이 영화에 그득하게 들어 찬 기이한 에너지를 추동하는 것 역시 단선적인 인물 관계이다. 유사한 성질을 지향하는 영화들(<피아니스트>, <님포매니악>)이 다층적인 레이어를 통해 인물 내면의 불화를 심화하는 것과 상이하다.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에서는 인물의 행위와 영화적 사건 대부분이 마틴-에바라는 부녀 관계 문제로 환원된다. 인물의 욕망을 질료 삼아, 둘 사이를 가르는 윤리적 잣대를 넘나들려 한다.


내겐짜릿한꿈이있어2.jpg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 스틸컷


초반부에 강렬하게 충돌하는 몽타주는 관객을 이 관계의 수렁에 빠뜨리는 역할을 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철판 슬레이트에 머리를 내리찍어 이마에 피를 내는 마틴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한 스턴트 여성이 대뜸 고릴라로 변한다. 이윽고 쇼트는 에바의 친구들이 입술을 물어뜯는 키스신으로 넘어간다. 피와 상처로 수렴하는 일련의 쇼트는 에바의 성적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발산되는지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그 발원지로서 마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감상은 영화 구석구석 박혀 있는 설정과 묘사를 통해 거듭 상기된다. 에바의 시선은 언제나 마틴의 옆자리로 향한다. 마틴 부부가 이혼하자 에바는 마틴과 단 둘이 살기로 하고 집을 알아보며, 자동차를 탈 때는 엄마가 앉던 조수석을 꿰찬다. 엄마가 소싯적 입었던 무대 의상을 착용하거나,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엄마를 쏴 죽이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 엘렉트라 신드롬을 넘어 선 살모(殺母)의 모티브다.


엄마를 대신하거나 연상케 하는 사람들도 제거 대상이다. 에바는 파티에서 마틴과 춤을 추던 금발 여성을 한 동안 노려본다.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에바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리한다. 에바의 시점 쇼트로 여성을 비춘 뒤 카메라의 초점은 다시 에바에게 옮아간다. 한껏 드러낸 겨드랑이와 등을 비추는 데 여념이 없다. 에바의 관능을 과시적으로 전시하려는 듯한 카메라는 에바의 욕망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기이한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내겐짜릿한꿈이있어4.jpg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 스틸컷


그 점에서 이 영화가 고수하는 촬영 방식이 흥미롭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핸드헬드로 촬영됐다. 형용하기 어려운 관계와 감정의 소용돌이를 포착해내기 위해서라고 짐작해본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흔들림은 인물의 요동치는 감정과 결합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불안을 조장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휘감은 엘라의 현 상황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셈이다. 마틴의 불안정한 상태를 표현하는 데에도 제격이다.


핸드헬드가 특히 두드러지는 건 오프닝 시퀀스다. 카메라는 마치 네 식구와 동승하기라도 한 양, 자동차 내부에서 에바 식구들의 모습을 잡는다. 자연스레 가까운 피사체는 비교적 더 흔들리고, 먼 풍경은 덜 흔들리게 연출된다. 이로써 한적한 동네 풍경과 에바 가족의 상황이 대조를 이룬다. 버튼을 조작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손을 내리치는 아빠 마틴.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에서는 불안이 온통 지배하는 가족의 풍경을 핸드헬드로 그려내고 있다.


요컨대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틴과 에바의 관계에 집중하게 하고, 관객의 윤리적 잣대 위에서 외줄을 타는 데에 성공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마틴의 시 ‘I have electronic dream'이 모종의 선언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한 무리의 야생동물처럼, 서로 소리 지르고 사랑하는, 때로는 때리기도 하면서.’ 마틴의 시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 한 사랑법을 직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부당을 논할 건 아니다. 이 100분짜리 줄다리기에서 영화에게 끌려간 관객이라면, 얼토당토않은 이 시에 수긍하게 된다.


내겐짜릿한꿈이있어1.jpg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 스틸컷


다만, 한 가지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앞서의 해석이 영화적 경험으로서 전해지느냐는 것이다. 이른바 '영화의 윤리성' 차원에서의 회의다. 이 영화는 차마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걸 담는 핸드헬드의 과도한 흔들림은, 마침내 화면 응시하기를 그만두게 한다. 이 영화 앞에서 표류하는 사람은 관객이 되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의중이 관객에게 올곧이 전해졌다고 하기 어렵다.


푸티지를 삽입하고 핸드헬드의 비중이 높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조차도 익스트림 롱쇼트를 통해 관객이 착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둔다. 더군다나 이 롱쇼트들은 영화의 서사와도 면밀하게 조응하면서 관객의 감정이 고조되거나 이완될 수 있도록 한다. 청소년 사이의 폭력과 강간, 성매매라는 소재가 결코 쉽게 동조될만한 것이 아님에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짙은 정취를 남기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정확히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이 결여한 영화적 요소다. 근접 촬영과 핸드헬드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관객으로서는 마틴과 에바의 단선적인 인물 관계에서조차 떨어져 나가게 된다. 쉴 새 없는 떨림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파격적인 소재에 대한 성실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내겐 짜릿한 꿈이 있어>은 아쉬움을 남긴다. 더하기에 집중한 나머지 덜어내기에 실패한 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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