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1993
공백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들이붓기가 필연이다. 상실 뒤 찾아오는 아픔은, 상실 자체보다 그 상실을 메우려는 시도에서 연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에는 무방비 또한 하나의 행위가 되어 어떤 방식으로든 주체를 옭아맨다. 구치되는 곳은 사유의 감옥이고, 교도를 집행하는 자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를 장악하는 과거의 존재들이다. 이 굴레가 위험한 이유는 감각질을 형해화해 주체를 시공간에서 영원토록 분리시킨다는 데에 있다.
<세 가지 색: 블루>에서는 교통사고로 일가족을 한 순간에 잃은 한 여성의 삶을 응시한다. 줄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떠난 자들과의 결별을 위해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한다. 그럼에도 파랑은 그녀의 뒤를 집요하게 좇는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파란 빛은 우울로 읽히기도, 개념화된 자유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으로 이해할 테인가. 이 영화는 잦은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을 줄리의 내적 세계로 인도하고 기어이 같은 감정에 빠뜨린다.
허나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굳은 믿음은 이 영화가 파놓은 수렁이다.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범해지는 오류들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생전에 남긴 말이 상기된다. “나는 문자 그대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본 적 없다. 단지 세상이 그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쉽게 쓰이는 공감의 언어가 우리의 일부를 감화시킬 수 있겠으나,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세 가지 색: 블루>는 이 태도를 가장 불온한 형태로 시청각화한 결과이다.
이 영화는 영상 매체가 관객을 현혹해 만들어내는 ‘조작된 공감’을 들춰내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택한다. 관객과 인물 사이의 정보 비대칭을 은밀하게 숨기려 한다. 남편 파트리스의 외도 사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밝혀진다. 올리비에는 줄리와 파트리스의 저택을 찾아 파트리스의 서류가방을 가지고 나온다. 서류가방에서 꺼낸 종이뭉치의 첫 장은 파트라스가 다른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카메라는 대뜸 사진을 한 장씩 클로즈업해 담기 시작한다.
이윽고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클로즈업한 쇼트로 넘어간다. 다음 쇼트에서는 악보를 보고 있는 줄리의 옆모습을 비춘다. 연쇄되는 이미지는 넌지시 방향을 일러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줄리 또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는 양 짐작케 한다. 이후의 감상은 대강 정해진다. 줄리의 감정은 외도한 남편으로부터 결별하기 위한 노력으로 읽힌다. 사건을 목격했던 소년과 만났을 때는 되레 파트리스의 죽음이 줄리가 의도한 결과가 아닌지 의심케 될 정도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추정이 진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루시를 만나기 위해 들린 매음굴에서 줄리는 우연히 파트리스의 뉴스를 시청하게 된다. 뉴스에서는 악보와 함께 발견된 사진들을 몽타주로 재생하고 있다. 그중 마지막 장이 파트리스와 정부가 다정히 찍은 사진이다. 키예슬로브스키는 클로즈업한 TV 화면과 줄리의 얼굴을 교차 편집해 그녀의 충격에 관객이 이입하도록 한다. 이때 느껴지는 건 이질감이다. ‘줄리는 사실 파트리스의 외도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은 이후 올리비아와의 대화를 통해 확고해진다.
일종의 배반이다. 밀접하게 맺어온 감정의 고리는 이렇게 후반부에 이르러 끊어진다. 이야기의 맥락이 흐릿하게 엉겨있는 이 영화에서 줄리의 감정은 관객이 붙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그렇기에 줄리가 파트리스의 불륜을 몰랐다는 반전은, 심리적 연대의 출발선을 일그러뜨릴 뿐 아니라 영화 감상의 토대가 되는 불문율마저 파기한다. 지난한 세월동안 유착됐던 스크린과의 상호성은 격파되고, 떠도는 이미지들은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보증은 여전히 어디에도 없다. 파리한 상호성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 자유는 창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줄리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질서를 재정립하기 위한 동선이다. 그녀는 법원을 찾아가 파트리스의 정부를 만난다. 아이가 들어 부른 배를 보고서는 그녀의 아이 명의로 파트리스의 집과 재산을 양도하기에 이른다. 줄리의 독립적 시선에서 새로이 그린 질서. 그녀의 자유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한편 악보 이어그리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 같다. 파트리스의 자장 아래 갇힌 사람은 줄리뿐 아니다. 올리비에 또한 파트리스의 유작을 이어받아 유럽연합 합주곡을 완성시키려 한다. 끝내 올리비에는 줄리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이름도 올려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줄리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한다. 둘이 관계를 갖는 곳은 사고 직전까지 줄리가 자던 침대일 것이다. 도돌이표에 거듭 부딪히는 사유의 순환은 그렇게 매듭져진 줄 알았다.
둘의 정사는 영화의 엔딩씬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정사하는 두 인물과 카메라 사이는 유리벽으로 가로막힌다. 유리벽에 닿은 채로 관계하는 장면은 잠시의 암전을 거친 뒤, 그간 등장했던 인물들을 한 명씩 비추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사고를 목격했던 소년, 줄리의 치매 걸린 노모, 아랫집 매춘부 루실, 그리고 파트리스의 정부와 그녀 뱃속의 아이까지. 악보를 써가듯 오른쪽을 향해 돌며 이들과 이들의 공간을 여념 없이 비추는 카메라는 끝내 줄리에게로 돌아간다. 클로즈업한 줄리 얼굴을 남긴 채 영화는 파란 빛으로 끝난다.
새로운 음악을 쓰는 듯했던 찰나의 기쁨. 자유는 기어이 획득된 것일까. 기쁨을 한껏 향유해도 되는 것일까. <세 가지 색: 블루>에서 줄리는 파랑을 움켜쥔 적이 없다. 주된 상징물인 파란색 크리스털 모빌조차, 본연의 색이 파랑이라고 단언할 수 없도록 묘사된다. 되레 파란 방에서 뜯어온 사물로서, 과거의 아픔으로부터의 단절을 지연시키는 매개처럼 비춰진다. 줄리는 기꺼이 크리스털 모빌을 새로 입주한 아파트 방에 걸어둔다.
오히려 파란색은 줄리의 밖으로 튀어 나와 그녀를 휘감곤 한다. 수영장의 총천연색 파랑은 쉽게 빛을 잃지 않는다. 단 한 순간, 루실이 그녀를 찾아올 때만 수더분한 모노톤으로 수영장 풍경이 담긴다. 줄리가 사건 이후 타자로부터 위안 받는 거의 유일한 씬이다. 파란 빛깔의 의미를 자유와 우울 중 선택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세 가지 색: 블루>는 파랑이라는 기표 뒤에 숨은 두 가지 기의를 동일한 것으로 일컫는 듯하다. 자기 일부로 내면화한 파랑은 일신을 자유롭게 한다. 반면 수렴되지 않아 바깥을 부유한다면 우울의 징조이다.
이 영화는 블루, 화이트, 레드로 이어지는 키에슬로프스키 연작 중 첫 작품이다. 각 작품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삼색기의 세 가지 가치를 영화적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나 각각의 가치가 갖는 의미를 현대적 맥락상 확장시키는 실험적 영화라는 점에서 <세 가지 색: 블루>는 실로 의미 있다. 적극적 자유가 소극적 자유를 압도해 개인이 상실된다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짚어져왔지만, 구체적인 해결을 모색하기란 여전히 시대의 과제다. 연작 중 블루는 이 모호한 영역을 정확히 건들고 있다.
물론 키예슬로프스키의 말마따나 <세 가지 색: 블루>가 해답을 내놓는 부류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답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가 고루한 틀에 갇혀 목적을 잃어가는 길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저 바라보고 동참하게 한다. 그 와중에 대중의 군집이라는, 정치적이고도 허상에 가까운 실체를 소거한다. 남는 것은 단독으로서의 인물과, 그 인물을 바라보는 가장 미분된 단위의 관객이다. 이로써 가장 순결하고도 숭고한 자리를 기꺼이 인간에게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