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마고(안야 테일러 조이)와 타일러(니콜라스 홀트)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두에는 곧 호화 요트 한 대가 도착하고 이들은 다른 고객들과 함께 요트에 올라탄다. 타일러는 그새 여러 말을 내뱉는다. 담배를 피우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이야기부터, 웰컴 푸드로 내놓은 굴 요리에 대한 감상평까지, 일방적으로 이어지는 타일러와 마고 사이의 대화는 요트의 행선지뿐 아니라 이들의 성격까지도 짐작케 한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고객들을 태운 요트는 어느 외딴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정확히는 섬 전체가 통째로 레스토랑이다. 신토불이를 지향하는 셰프의 철학에 맞추어 대부분의 식재료는 섬 안에서 자체적으로 공수한다. 그 까닭에 곳곳에 여러 시설이 갖춰져 있다. 채소를 키우는 밭, 소를 도축하고 숙성하는 창고, 양계장, 그리고 직원들과 셰프의 숙소.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 섬은 하나의 완성된 세계처럼 묘사된다.
영화에서는 이 레스토랑에 정해진 사람들만이 올 수 있음을 내내 강조한다. 레스토랑을 찾은 고객 면면만 봐도 화려하다. 저명한 미식 평론가, 잘 나가는 사업가, 유명세를 구가하는 연예인 커플, 나이가 지긋한 사업가 부부. 고결하고 부유한 이들만이 이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자격을 얻는다. 만만찮은 식비가 이들의 수준을 증명한다. 1,200 달러를 한 끼 식사에 지불할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웨이터들이 고객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정도의 서비스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인 양 묘사된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된다. 메뉴 또한 이들의 신분과 지위를 고려하는 듯한 구성으로 꾸려진다. 에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각양각색의 다채로운 코스가 준비돼 있다. 코스가 이어지면서 이곳 레스토랑의 실체가 밝혀진다. 12명의 고객 중 살아서 돌아갈 자는 없다. 셰프를 비롯한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더 메뉴>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 이 작은 섬에서 모두가 죽을 것이다. 파인 다이닝의 완성을 위해서.
<더 메뉴> 스틸컷
#2.
마고는 이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인물이다. 요트에서 내려 고객 명단을 체크할 때부터 문제가 된다. 사실 마고는 원래 이 레스토랑을 예약한 고객이 아니었다. 원래 오기로 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고, 그가 오지 못하자 타일러의 초대로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마고의 존재가 모종의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리라는 건 감지되는 사실이다. 예상치 못하게 마고가 등장하자 슬로윅(랄프 파인즈)를 비롯한 레스토랑 관계자들은 난색을 내비친다.
예상대로다.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최후의 만찬이다. 이 작은 섬에서는 모든 것이 슬로윅의 계획대로 통제되고, 모든 사건이 그의 계획대로 전개된다. 섬 전역에 통제력이 미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과시적인 이벤트를 삽입하고 그곳에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남자 고객들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만 역시나 모두 잡히고 만다. 마고가 SOS 신호를 송신하자 레스토랑을 찾아온 순찰요원 또한 심어놓은 연기자였다.
이곳에서 마고는 통제되지 않는 단 하나의 변수다. 마고를 제외한 열한 명의 고객이 세간을 빗댄 전형적 인물들이라면, 마고는 이들의 평가에 크게 개의치 않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고 또한 평가 주체다. 다만 고매한 식견이 평가 잣대가 되지는 않는다. 되레 마고는 거듭해서 상기하고 회귀하려 한다. 그가 떠올리는 요리사-고객이라는 전통적인 관계에서, 식사 여부는 고객이 결정한다. 다시는 입맛에 현란한 언변을 덧대는 릴리안(자넷 맥티어)이나 타일러와 달리, 그래서 마고는 식사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먹지 않는 편을 택한다.
어쩌면 마고는 <더 메뉴>가 영화가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더 메뉴>와 유사한 컨셉이나 스타일의 영화는 이미 많다. 밀실을 소재로 계층 의식 다루며 전복이나 파괴를 그리는 영화들. 때로는 끝에서 이르러 희망과 화합을 말하기도 한다. 당장은 <더 플랫폼>이나 <쏘우> 시리즈 등이 떠오른다. 거슬러 올라가서는 루이스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도 있겠다. 주도자 혹은 거대한 원리에 의해 갇히고, 그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는 설정을 공유한다. 여기서 <더 메뉴>는 마고를 투입한다. 이로써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내려한다.
<더 메뉴> 스틸컷
#3.
슬로윅은 다층적인 계급 구도 위에 놓인 인물이다. 사건의 이유, 그러니까 슬로윅이 집단 살인을 계획한 이유는 내재됐던 전통적 계층 의식이 발로한 결과다. 그는 메뉴를 소개하면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불우한 가정환경을 고백한다. 슬로윅에게는 그렇게 살아내어 얻은 예술적 가치로서의 미식이 있을 테다. 하지만 이 눈물 젖은 가치는 평단에게 쉽게 재단된다. 예술이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은 호평과 불평을 가리지 않는다. 릴리안의 호의적인 미식 비평도, 타일러의 호기로운 추종도 슬로윅에게는 피차일반 다르지 않다.
그런 슬로윅이 꿈꾸는 것은 전복을 통한 붕괴다. 하지만 기준선이 붕괴된 곳에는 더 이상의 평등도, 자유도, 박애도 없다. 그러니 다양성을 보존할 공간도 남아있지 않다. 슬로윅이 다층적인 계급 구도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제 어미를 무시할 줄 알며, 지위를 이용해 하급 직원을 성적으로 착취할 줄 안다. 제 아비처럼 허벅다리를 찔리는 정도의 징벌로 속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슬로윅이 자기 아버지와 다를 것은 없다. 똑같이 권위적이다. 슬로윅은 앞에 놓인 고객을 혐오하지만, 이는 동시에 자기혐오다.
<더 메뉴>에는 한 순간의 플래시백도 없다. 교차편집도 없다. 그저 시간 순으로 사건을 배열한다. 일면 나이브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추악하거나 모순적인 슬로윅의 면면이 관객에게 노출되는 효과가 생긴다. 결과적으로 죽이는 사람과 죽이려는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슬로윅의 살인 계획에 자기를 비롯한 레스토랑 직원들이 포함돼 있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다. 코스 메뉴의 완성이라지만 한편으론 극도의 허무주의다.
그러므로 사람은 단연코 이편과 저편으로 갈려야 한다. 슬로윅의 세계에서 이편과 저편은 사실 같은 성질이다. 그러니 모두를 죽일 수 있다. 그래야 메뉴를 완성할 수 있다. 초대된 고객들이 제격이다. 열두 명의 고객들이 주도면밀하게 머리를 맞댔다면 나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들이 레스토랑에 귀속되는 건 불가항력적이다. 이 꼬리와 머리가 맞닿은 이분법적 구조로부터 살면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상했던 슬로윅 앞에 마고가 놓인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사람이자, 거듭해서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이 영화에는 블랙코미디이면서도 별도의 메타 유머가 필요 없다. 마고가 제4의 벽을 뚫어내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슬로윅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마고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것뿐이다. 자기 세계에 귀속시키기 위한 방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고를 붙잡을 수 있을까. 마고는 결코 멈춰 세울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더 메뉴> 스틸컷
#4.
이 영화는 한편으로 마고의 성장담처럼 읽히기도 한다. 슬로윅의 구분법을 빌리자면 마고는 저편의 옷을 입은 이편의 사람이다. 마고는 슬로윅처럼 고객들의 추악한 면을 잘 안다. 맛을 찬미하는 타일러가 하릴없는 자기 위무를 해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섹스 서비스를 제공했던 이력 탓에 레스토랑 고객 중 한 명과는 이미 안면식이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마고야말로 슬로윅이 말했던 남루한 삶을 살았던 전형적인 사람인 셈이다.
그러나 마고는 슬로윅이 원치 않는 방향대로 내달린다. 영화 도입부에서 셰프의 방은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될 곳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마고는 대뜸 그곳으로 향한다. 무전기만 찾은 게 아니다. 스크립트한 신문을 보고 슬로윅이 살아왔던 이력을 알게 된다. 그러고는 돌아와 치즈버거를 시킨다. 이로써 슬로윅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소실했던 본래의 원칙을 상기시킨다. 셰프는 손님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지극히도 당연한 불문율을 다시 세운다.
이 동선은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는 마고는 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레스토랑 또한 다른 이의 이름을 대신 빌려서 들어온 입장이다. 다른 이의 삶을 대신 산 덕택으로 돌아오는 건, 필히 죽어야 한다는 말 되지 않는 조건이다. 그래서 마고는 여성들끼리 남은 상황에서야 자기 본명이 에린이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누구도 좀처럼 깊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여전히 마고는 마고로 불린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과거를 상기하는 것. 마고가 이름을 되찾는 방법이다. 에린이라는 이름은 레스토랑 바깥에 있다.
슬로윅과 마고가 다른 점이 있다면, 레스토랑 바깥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되찾을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마고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다. 여전히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줄 안다. 포크를 내던질 줄 안다. 그런 마고의 모습은 슬로윅과 대비된다. 슬로윅은 허영 가득한 고객을 증오하면서도 그들만을 위한 고급스런 요리를 내길 멈추지 못한다. 치즈버거를 굽던 과거의 시절은 빛바랜 신문 속 박제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제 에린으로 불러야겠다. 마고는 에린이 되어서 떠난다. 에린은 슬로윅이 상실한 이름이자 의도적으로 제거한 기억이다. 에린은 보트 시동을 켜고 어두운 바다를 뚫고 앞으로 향한다. 애석하게도 보트는 대뜸 멈춘다. 그럼에도 에린이 다시 마고로 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에린은 선수 갑판에 앉아 포장해온 치즈버거를 먹기 시작한다. 상기한 과거에서, 슬로윅이 끝내 가지 못했던, 그러나 가야 했던, 에린의 길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