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쉰 적은 있던가. 영화는 잠에 든 쥘리를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며, 안식이 허용된 그 유일한 순간마저도 잘게 쪼개 놓는다. 이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일상은 그녀에게 일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아이들을 옆집에 맡긴 뒤 곧장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역에 도착한 쥘리는 간신히 기차에 올라탄다. 무사히 출근을 해낸 뒤 내뱉는 안도의 한숨이 그녀의 삶을 짐작케 한다. 쥘리는 아이들을 홀로 키우는 이혼녀이자, 외곽 마을에서 파리로 출퇴근하는 워킹맘이다.
<풀타임> 스틸컷
<풀타임>은 빠른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스릴러 장르의 연출 방식을 구사한다. 쥘리가 달릴 때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걸음을 맞추거나 뒤를 밟는다. 그렇게 구축된 씬 사이에 얼굴을 클로즈업한 쇼트가 인서트 된다. 이로써 쇼트의 길이는 더 짧아지고 영화의 호흡은 빨라진다. 또한 인물의 동선과 표정이 교차되며 각박한 상황과 궁핍한 감정 상태가 강조되는 효과가 생긴다. 일상의 드라마에 데이비드 핀처의 <패닉룸> 등을 연상케 하는 편집 방식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허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건 시나리오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유가 편집이라면, 긴장감의 기원은 촘촘한 설정이다. <풀타임>에선 양립할 수 없지만 기필코 양립해야만 하는 두 가지 상황을 중첩시킴으로써 쥘리를 이도 저도 못하는 처지로 내몬다. 충실한 엄마로서의 삶과,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삶. 다니고 있는 직장과, 다니고 싶은 직장. 그리고 나의 일상과 타자의 일상. 한쪽을 지키면 다른 한쪽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둘 다 부여잡아야 하는 난처함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 운수노조 파업을 설정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윤리적 관념에 돌을 던진다. 낭만적인 기대와 달리 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끝나지 않는다. 권리를 찾는 과정은 타자의 일상을 해칠 수 있다. 물론, yes or no의 파리한 이분법과도 다른 것이 현실이다. 여하튼 공존은 모색돼야 한다. 이때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가. <풀타임>은 애써 감춰놓았던 현실의 딜레마를 들춰낸다.
<풀타임> 스틸컷
쥘리가 빚는 갈등을 여과 없이 비춤으로써 질문에 깊이가 더해진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의 일상을 갉아가며 자기 삶을 유지하는 처지다. 이직을 원하던 쥘리는 면접을 보기 위해 무단으로 조퇴한다. 다음날 자기 일을 마쳤으니 대타가 필요 없지 않았느냐는 되지 않는 이유를 꺼내놓는다. 그런 그녀는 결국 역무원에게 소리 지르고 따져 묻기에 이른다. 권리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살 없이 뼈만 남은 앙상한 자의 외침이다. 그리고 역무원에게서 돌아오는 건, 소관이 아니라는 답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대사는 다른 인물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내용이나 형식으로 이뤄진다. 아이를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겠다는 이웃 노인, 쥘리가 괘씸해서라도 시간을 바꿔줄 수 없다는 동료의 대사가 그렇다. 물론 일면 도식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쥘리의 난처함을 강화하기 위한 캐릭터로 보이는 면이 있어서다. 다만,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기는 쥘리 본인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묘사하려는 건 이 굴레다. 쥘리가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남성에게 입을 맞추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풀타임> 스틸컷
요컨대 <풀타임>은 빠른 편집으로 일상의 긴장을 묘사하고, 작중 인물들을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처음은 간청으로, 다음에는 빚지는 것으로, 종국에는 단절하는 것으로 인물의 관계가 치닫는다. 그렇게 이 영화는 사회적 자본을 소진한 사회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일까. 이직하려던 회사에서 합격 전화가 오는 결말에도 영화는 쉬이 밝아지지 않는다. 곧장 출근할 수 있다며 방긋 웃는 그녀가 처연해 보이지 않던가. 비극을 알면서도 품어야 하는 희망이라면, 진정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