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는 스산한 면이 있다. 대뜸 돼지를 등장시키지 않나, 해변에서 휴양하는 사람을 무참히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가 발산하는 기이함의 근원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음각과 양각의 교차로 이룬 짙은 콘트라스트다. 닐(팀 로스)은 인조광으로 상징되는 자본의 틈바구니서 벗어나, 자연광이 만연한 세계에 머무르고자 한다. 그래서 멕시코에 남기로 한다. 하지만 자연광이 빚는 빛과 어둠의 낙차는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린다.
카메라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외면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닐이 햇볕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시점쇼트로 표현되는 그의 시야에는 해변을 비추는 태양광이 선히 담긴다. 햇볕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수반하지만, 여기에 주목하기에는 정신이 없다. 결국 그림자는 해가 지고 어둑해진 싸구려 숙소 단칸방에서 일시불로 대갚음해진다. 닐은 그 어둠 속에서 섹스를 한다. 찬란하거나 즐거운 것으로 묘사될 수 없다. 그 어둠은 일종의 부채의식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는 순간조차 닐은 피동형일 수밖에 없다.
<썬다운> 스틸컷
닐이 느낄 것은 극도의 무력감이다. 이 심리 상태를, 배우 팀 로스는 조금씩 뒤처지는 움직임을 통해 표현한다. 그는 앨리스(샤를로트갱스부르)가 멕시코로 되돌아왔을 때조차 한 발 늦게 반응한다. 이로써 스크린 너머로 전이되는 것은 자각된 공백이다. 닐은 주인공으로서 갖는 전형성을 거의 모두 파괴한다. 중심인물에게 흔히 요구되는 결정들을 일거에 유예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지로 자기 앞길을 채운다.
이는 주체성을 포기하려는 강력한 저항이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죽음은 사실 대수롭지 않다. 닐은 영국의 유망한 축산·도축업 가문의 아들이다. 그간 향유해온 넉넉함 뒤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의 애처로움이 있었으리라. 그런 그의 눈앞에는 갖가지 유형의 죽음이 병렬적으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그는 덤덤하다. 이미 죽음을 체화한 그에게, 인간의 죽음은 돼지의 죽음과 다름 아니었던 게 아닐까.
닐의 식구에게 있어 윤택한 삶은 죽음 위에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 삶일수록 필연적으로 경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이 인간성을 유폐했듯, 감독은 이들에게 카메라라는 무기를 통해 징벌을 내린다. 영화는 닐의 가족을 각박한 프레임 안에 가둬버린다. 앨리스의 공간, 즉 초호화 호텔은 겹겹의 격벽으로 이뤄진 것처럼 묘사된다. 오프닝 시퀀스의 무대가 되는 호텔 객실에선 이들 가족 외의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어느 장면에서든, 화면에 이들 가족의 모습을 가득 채워 도살장의 돼지처럼 그린다.
<썬다운> 스틸컷
닐은 자신이 소거되는 편이 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엔딩 쇼트는 이 영화에서 인물의 공백을 전시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 그 빈자리는 아마 닐의 것일 테다. 요컨대 <썬다운>에서 관심사는 죽음 자체다. 영화의 시작은 어머니의 죽음이고, 그 뒤로 세 사람의 죽음이 더 있다.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모두 예고된 죽음이다. 일상의 저 뙤약볕은, 찬란해 보여도 결국 내 피부를 벗기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징벌적 세상에서 나를 되찾는 건 죽음을 승인하는 허무주의적 태도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