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눈을 떼게 만든다. 미장센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몫은 몽타주 편집에 있다. 빠르게 전환되고 충돌하는 쇼트는 이 영화에 대해 전통적 의미의 온전한 감상을 어렵게 한다. 츠카모토 신야가 그리는 강철 세계란 이런 것이다. 서사에 내재된 인과성을 파악하기도, 인물의 감정을 좇기도 이 영화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강철이 부딪히고 조립되듯, 충돌하여 박살 나거나 합쳐지는 쇼트들만 부유한다.
이해 못 할 쇼트가 나열되는 양 보이는 이유는 애당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배열이 부재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다른 문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철판 긁는 소리를 선율로 받아들일 수 없다. 본연한 음역대가 다르기에 감상의 범주를 넘어선다. 귀를 개조하지 않는 이상 기괴한 마찰음만 들리기 마련이다. 츠카모토 신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던 것 같다. <철남>의 세계에서는 시종일관의 불편함이 미학으로 여겨진다.
<철남> 스틸컷
기계의 눈을 갖지 않았기에 이 영화의 심도는 모르겠다. <철남>을 두고 '어디까지 갔느냐'를 논할 수는 없을 테다. 허나 방향성만큼은 감지할 법하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이 영화를 바라보는 잣대로서 유효하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당대 일본 사회를 되짚을 수밖에 없다. 유례없는 호황이 장기간 계속됐다. 실패 없는 경험에서 합리주의는 확고한 신념이 된다. 일본 서브컬처 문화의 부흥과도 무관하지 않다. 회의적 인간은 훌륭한 인간상에서 분리되어 서브컬처라는 제한적 영역에 유폐됐다.
그러나 탑이 높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지고, 언젠가 무너질 거라는 불안도 커진다. <철남>의 이미지는 그 반영이다. 팽배해진 기계문명의 민낯을 들춰내려는 전복 의지가 영화라는 매체를 만났다. 스피드맨은 더 빨라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자기 다리에 철골을 심는다. 그가 처음 마주한 이미지는 구더기가 들끓는 장면이다. 기계를 이식하기 위해 생살을 찢어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부패인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되레 기계로 인해 본래의 성질을 제거당한다. 장악하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다.
주인공 남자 또한 인간적임을 상실하긴 마찬가지다. 드릴로 변하는 그의 성기는 다른 신체부위와 조화롭지 못하다. 왜곡된 갈망 혹은 욕망이 투영되기라도 한 듯, 굵고 크며 거칠다. 결국 그는 드릴 성기로 사랑하는 애인의 몸을 뚫기에 이른다. 이는 기계문명에 복종당한 일본에 대한 비관적 전망처럼 읽힌다. 믿음은 사람을 흩어지게 한다. 맹목적으로 추종되는 기계적 합리는 결국 인간을 장악하는 데서 나아가 사랑과 관계를 도륙할 것이다.
<철남> 스틸컷
내게 이 영화의 자기 파괴적인 결말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희망은 정작 합리성이 아니라 회의적 감상에서 발아한다. 주인공 남자는 추악한 모습으로 온갖 기계와 엉켜 키메라처럼 변한다. 남기는 메시지는 세상을 녹슬게 하자는 것이다. <철남2> 역시 유사한 엔딩으로 매듭 져지는 것으로 보아, 츠카모토가 구상한 철남 시리즈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 대사인 것 같다. 기계로 몸을 대체한 철남은 왜 세상이 녹슬기를 바라는가.
결말에 이르러 과거의 사건이 밝혀진다. 남성은 스피드맨을 산속에 묻고서는 그 앞에서 자신의 애인과 섹스를 했다. 이들의 정사는 무덤에 묻힌 스피드맨의 시선에서 로우 앵글로 잡힌다. 파편화된 쇼트 사이에서, 이 플래시백은 가장 온전한 장면이다. 합리주의적인 쇼트 배열에 익숙한 관객으로서는 자기 감상을 여기에 귀착시키게 된다. 플래시백의 관음적 구도는 이렇게 관객의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철남> 포스터
<철남>에서는 내내 텔레비전이 나온다. 정사 씬 역시 텔레비전을 거쳐 영사된다. 이로써 영화는 관객에게도 죄의식을 안긴다. 생의 소멸 앞에서도 서로의 몸을 탐미하는 자들, 그리고 이들의 정사를 바라보는 쾌락을 즐기는 자들. 비디오를 거친, 가상의 무형을 즐기는 이들에게 <철남>은 침을 뱉는다. 이 타액은 조소다. 혐오다. 그러나 이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 제정신을 찾게 해 줄 냉수다. 또한 유폐된 회의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분무이기도 하다.
견고한 합리주의적 세계에서 철남은 그 자체로 숭배받아 마땅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철남은 완벽한 강철 신체를 얻었음에도 일상을 상실해야 하는 모순을 자각하게 된다. 녹슨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은 이 자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철남에게 멸종된 인간성은 회의주의와 가닿는다. 그러므로 녹이란, 앞서 말한 타액에 대한 영화적 은유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겠다는, 발칙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