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객관화 연작 에세이 1부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 Friedrich Nietzsche, via Eternal Sunshine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행복했어.”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 조엘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상처 주고, 상처받았고, 다시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엘은 기계에 몸을 맡기고, 하나하나 기억을 지워나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조엘은 그 안에 담긴 소중했던 감정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기다려! 이 기억은 남기고 싶어!”
이 장면은 단지 이별의 아픔을 다룬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
즉 자기객관화의 시작이다.
자기객관화란 감정을 밀쳐두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나 사이에 잠시 ‘거울’을 세워보는 일이다.
그 감정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살펴,
흐르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와 흘러가는 감정 모두를 함께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조금은 멀리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나게 된다.
감정을 밀어내고 싶었던 조엘은, 결국 감정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순간이다.
자기객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감정의 중심에 있는 나’로부터 살짝 비껴서, 나를 스쳐가는 감정을 바라보는 일.
그 거리는 멀어질수록 차가워지고, 너무 가까우면 다시 휩쓸리기 쉽다.
그러니 자기객관화는 거리의 기술이며, 동시에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심리학자들은 자기객관화를 흔히 ‘메타인지’ 능력과 연결해 설명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고,
위급한 순간에 판단을 멈추게 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 없이 되짚어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감정은 느껴지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 감정에 대한 자기객관화의 함정을 경계하는 말
하지만 자기객관화는 언제나 유익하기만 한 걸까?
요즘 사람들은 감정 앞에서 곧바로 ‘해석’하려는 습관이 있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를 곱씹는 사이, 정작 그 화를 충분히 느끼는 일은 놓쳐버린다.
자기객관화는 감정을 외면하는 핑계가 되기도 하고, 자기 검열과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정서적 거리두기 기술로 퇴화하기도 한다.
자기객관화는 감정을 외면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에 붙들리지 않는 기술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객관화는 윤리적인 작업이다.
감정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일으킨 파문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기객관화는,
SNS 시대의 ‘자기 연출’과는 분명히 다르다.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은 결국,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사는 법을 잊는다.
요즘 우리는 스스로를 외부 시선으로 끊임없이 보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아요 수, 뷰 수, 누군가의 피드백이 ‘객관적인 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 만든 ‘무대 위의 나’이지,
진짜 나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진짜 자기객관화는 ‘보이기 위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기객관화 능력은 특히 청소년기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이 시기를 ‘상상적 청중(imaginary audience)’의 시기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믿는 착각 속에서,
청소년은 처음으로 ‘나’를 외부의 시선으로 인식하게 된다.
나는 내가 나를 보는 방식만큼만 나를 믿는다.
하지만 그 시선은 아직 자기비판적이지 않고,
자기 확신과 불안을 오가며 흔들리는 자아를 만든다.
또한 이 시기의 감정은 격렬하고, 판단은 유동적이며, 정체성과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훈련과, 감정을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훈련이 모두 필요하다.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면,
감정에 휘둘리거나, 감정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된다.
영화 속 조엘이 기억 삭제를 포기하고,
그 감정의 흔적을 붙잡으려 했던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감정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객관화는 감정을 잊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에 속지 않기 위한 기술이다.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결국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종종 이상한 풍경을 본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갈등을 일으키며,
말끝마다 “내가 왜 그런지 알아?”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상대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자기 마음을 바깥에서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거울이 없으면,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서 나를 확인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