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가스라이팅의 빌런

연재 속 에피소드는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관점에서 새롭게 창조된 이야기입니다.



미올은 새벽까지 켜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 밑으로 거무스름한 그늘이 져 있었고, 머릿속은 기획안을 뒷받침할 자료를 수치화하고 도식을 그리느라 아득해져 갔다.

미올은 처음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을 때의 설렘과 기쁨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계약직이지만, 그나마 버틸 힘은 선망해 온 우상과 협업한다는 자부심이었다.


미올이 속한 프로젝트팀의 팀장은 완벽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업계에서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신화 같은 존재로 추앙되었고, 누구나 그를 닮고 싶어 했다.

미올도 그랬다. 실제로 그의 옆에서 일하며 자신도 성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동기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어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인정을 받는 순간,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미올은 파일을 저장하여 사내 메신저로 팀장에게 보내고 기지개를 켰다.

팀장은 바로 그녀의 메시지를 받아 읽었다. 검토하는 동안 미올은 비로소 약간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탕비실로 향하려는 순간,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이었다.


"이게 너의 최선이야? 그날 반짝이던 열정은 어디 간 거야?"


팀장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타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 다시 고쳐보자.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밤은 깊어졌고, 사무실엔 오직 키보드 소리만 남았다.


결국 미올은 출근 후 퇴근하지 못한 채 세 번째 모닝커피를 들고 팀장의 책상 앞에 섰다.

10분 전에 도착한 팀장은 밤새도록 그녀가 작업한 결과물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팀장의 안색을 살피며, 자신이 마실 커피가 아닌 팀장의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좋아, 이제 조금 나아졌네. 표지 디자인에서 색을 바꿔서 시안을 가져와 봐."


팀장은 밝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멍한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역시 원석을 알아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네 아이디어가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니, 이제 다 됐어."


미올은 뻑뻑해진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다잡았다.

'기획서 마감이 오늘이야. 표지만 바꾸면 된다잖아.'

그녀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자기 기획서가 선정될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고, 미올의 아이디어는 화려하게 변신하여 상부에 보고되었다.



"가빌 팀장, 이번 기획은 대단했어. 단장님이 보시자마자 사업단으로 들고 가셨다고."

"다 부장님이 이끌어주신 덕분이죠."


미올은 자기 아이디어가 가빌의 이름으로 발표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팀으로 묶여 있었기에 팀장의 성공이 팀의 성공이고, 자신의 성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허탈감은 무엇일까?



며칠 뒤, 사업단 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 프로젝트 성공으로 XX 사업단에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건가?"

"아니야, 이미 이야기가 오갔던 것 같아. 이번 프로젝트는 몸값 올리는 결정적 한 방이 된 것뿐이고."


미올은 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팀장은 프로젝트 성공 이후 자신의 성과를 강조했고,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한 마디도 그녀의 공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여에 위로하던 팀원들은 팀장의 부도덕한 행태에 분노하기보다, 팀장의 부재로 인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허둥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속은 울렁거렸다.

'내 모든 밤샘과 아이디어가… 결국 팀장의 성장에만 사용된 거구나.'



미올은 낙담하여 이틀을 앓아누웠다. 열 때문에 출근할 수 없어 재택근무로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가방 안에 사직서를 넣고 출근한 아침, 인사부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계약직으로 사직서도 던지지 못하고 계약종료를 통보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미올씨, 이번 프로젝트는 잘 넘겼죠?"

"네."


미올은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거친 숨결이 흘러나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가빌 팀장이 떠나면서 미올씨를 추천하더군요. 팀을 다시 꾸려봐요."


순간 미올은 그동안의 배신감과 성취감이 머릿속에서 엉키는 것을 느꼈다.

'나도 이 구조 속의 일부구나. 피해자이면서, 언젠가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벗어날 수도, 멈출 수도 없게 만드는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었다.

분노가 그녀를 흔들었다. 허탈과 배신을 넘어선, 뼛속 깊은 분노였다.


“내가 흘린 시간은 누군가의 포디움이 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깨달았다.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조를 보는 눈이자, 행동으로 연결되는 에너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 루소


그 사슬은 자본, 권력, 신화화된 상사였다.

하지만 사슬을 감각하면, 최소한 휘둘리지만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분노와 깨달음 속에서 미올은 다짐했다.

더 이상 영혼을 무제한으로 갈아 넣지 않는다.


기록하고, 증거를 남기고, 함께 말할 사람을 찾는다.


작은 연대라도 만들어 구조를 흔들고, 불의를 폭로한다.



분노는 복수심이 아니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인식, 행동의 출발점, 그리고 연대로 연결될 때만 사회를 조금씩 바꾸는 힘이다.

미올의 분노는 이제 내적 체념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창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과 더 큰 정의를 향해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