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유예하는 사람들

드러나는 진짜 공기

by 미네르바의 올빼미
연재 속 에피소드는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관점에서 새롭게 창조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회의가 끝나면 사무실 분위기는 유난히 고요했다.

팀장의 말투는 단정했고, 문서도 꼼꼼히 읽었다.

겉보기엔 ‘능력 있고, 권력욕은 과하지 않은 상사’의 모범 그 자체였다.

하지만 미올은 그 평온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징후임을 알고 있었다.

팀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늘 동일한 모양새였다.

보고는 매끄러웠고, 지시는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끝마다 붙는 논평이 문제였다.


“이건 제가 전체적인 톤 앤드 매너에 맞게 다시 편집할게요.”

“이 협력사는 제가 직접 만났습니다. 아, 미올 씨는 공유만 받아두세요.”


톤은 부드러웠지만, 업무의 모든 주도권이 조용히 팀장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팀원들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도 모른 척하는 듯했다.

가빌 팀장이 떠난 뒤, 이 팀은 ‘다음 권력’을 조용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 몇 명의 팀원이 수군거렸다.


“팀장님…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구조를 빨리 너무 파악하는 거 아니야? 내부 사정도 거의 꿰고 있던데.”

“이사님 라인이라는 소문 있던데?”

“에이, 이 업계에서 라인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래서 지금은 굳이 편 안 드는 게 좋아. 섣부르면 곤란해져.”


입술은 조용했지만, 말끝마다 ‘판단을 남에게 미루는 자들의 냄새’가 났다.

미올이 지나가자, 누군가 낮게 말했다.


“뭐… 너무 튀면 손해니까.”


누가 튄다는 말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미올은 기획 예산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기존의 기획 예산과 확연히 다르게 집행되고 있는 예산들이 보였다.

누락된 집행 내역.

과도하게 책정된 홍보비.

팀원 누구도 모르는 외부 협력사 이름.


“이건… 뭐지?”


미올은 더 파고들 결심을 했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주간 회의 전, 세 명의 팀원이 미올에게 다가왔다.


“오늘 또 질문할 거예요?”

“뭔가 보이긴 하나 본데… 그냥 적당히 하는 게 좋아요.”

“팀장님이 지시하는 건데, 계속 불편한 얘기 하면 손해 보는 건 미올 씨라니까.”


그들의 말투는 걱정하는 척했지만, 말 속에는

‘우리는 끼고 싶지 않다’라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다.

미올이 침묵하자, 한 팀원이 툭 말했다.


“난 몰라. 누가 옳든 틀리든, 그런 거 중요하지도 않아. 난 빼 줘.”


그들은 이미 판을 벗어나 있었다.

판단하면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시작됐다.


“혹시 지난 프로젝트 예산에 대해 보완 의견 있으십니까?”


팀장의 목소리는 정숙하고 부드러웠다.

미올은 손을 들까 말까 망설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시선을 내려 서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거나, 펜 끝만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녀가 손을 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미올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 순간 팀원들 얼굴에 스치듯 지나간 안도의 기색—

그것이 이 사무실의 진짜 공기였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한과장'이 말했다.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야. 다들 알지. 근데…”


그 ‘근데’ 이후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서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봐.”


미올은 마음속 깊이 깨달았다.

이들이 말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다.




판단을 유예하는 사람들은 악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악이 자라는 침묵의 온실이다.

중립은 선이 아니다.

중립은 언제나 힘이 있는 쪽으로 조용히 기울어지는 선택이다.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

책임을 피하고 안전만을 택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드는 세계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계다.




그 세계에서는

불의가 자라며,

고발자는 고립되고,

부당함은 제도처럼 굳어간다.

미올은 새삼 깨달았다.



“싸워야 할 상대는 권력자뿐이 아니다.

판단을 유예한 채 따라가는 이 ‘공기’ 자체가 또 하나의 적이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