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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l 09. 2023

농담과 성희롱 사이

친구가 단톡방에 올린 사진 한 장

동갑내기 산친구들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한 여름 해변가에 비키니를 입고 있는 늘씬한 여성들의 뒷모습이다. 맥주집이나 카페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진 한 장. 사진을 올린 친구는 아마도 푹푹 찌던 날씨에 기분 전환 하라는 단순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다는 둥 엉덩이를 터트려주고 싶다는 둥 농담들이 오갔다. 난 이런 상황이 아주 불편하다. ‘저런 등짝 나도 갖고 싶다’는 여자친구처럼 왜 쿨하게 넘기지 못할까. ‘여성신체 대상화 희화화’ 어쩌고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것)하게 만들어 버렸다.     


20여 년 전 남자들이 우굴거리는 첫 직장은 마초집단이었다. 최고 지성을 자부하던 그들이 술만 먹으면 여자 연예인들을 안주삼아 낄낄 거리는 모습은 참 힘들었다. 여자 후배가 옆에 앉아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보다 그걸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내가 더 싫었다. ‘그 더러운 입 좀 닥치라!’고 밥상을 엎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한 번은 부서회식 후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선배들이 ‘도우미’ 아줌마를 불렀다. 평소 점잖기로 유명했던 선임 선배의 주도였다. “어머, 여기 여자 있는데 왜 불렀어요?” 노래방을 들어서던 도우미 아줌마가 던진 그 한마디. ‘아무말 못하고 있는 너도 똑같다.’라는 조롱처럼 들려서 모멸감인지 수치스러움이지 모를 감정으로 그 자리를 얼른 빠져나왔다.      

 

바늘구멍 같다는 언론사 입사 최종 면접에서 한 임원이 물었다.

“밤 12시를 넘기는 야근 밥 먹듯 하는데 할 수 있겠어요?”

“남자들이 대다수인 부서에서 잘 견딜 수 있겠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난 “예!”라고 대답했다. 그 질문이 이런 종류의 인내심을 포함한 말인 줄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만 수두룩하던 부서에 여자 후배가 ‘이물감’ ‘불편함’으로 느껴질까 입 꽉 깨물고 견뎠다. 다행히 내 다음 기수로 여자 후배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부서의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었다.      


‘둥글둥글,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좋은 게 좋은 거’ 성격 좋은 사람으로 통하던 내가 ‘여직원 성희롱’ 사건의 총대를 메고 회사와 싸우게 된 건 우연 치고는 좀 우습다. 회식 자리에서 사장이 양 옆에 여직원을 앉히고 임산부였던 여직원에게 술까지 강권했던 일에 분개해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물론 노조의 여성국장이라는 타이틀 탓도 있었겠지만 내 안의 꿈틀대던 알량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리라.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던 회사를 상대로 싸움을 한다는 건 회사를 떠날 각오를 하고 시작했어야 하는 일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두 딸이 그때의 내 나이가 돼 간다. 딸들이 여성의 꼬리표를 달고 여성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의 참담함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긴 세월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음에 좌절한다.

나의 친구들이 그때의 선임 선배들의 나이가 됐다. 회사의 데스크가 되고 중역이 되고 어른이 됐다. 딸 같은 젊은이들이 아니 딸들이 그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하고 인턴 자리라도 얻을까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허물없는 친구들이 젊은 여인의 사진을 올리고 생각 없이 농담하는 게 난 싫다. 그러지 말라고 큰소리치고 싶다. 결국 ‘성인지감수성’이란 것은 나와 상대의 감정의 관계, 소통의 문제다. 나는 재미로 한 말이 상대는 불편하고 거북할 수 있다는 배려다. ‘뭘 그런 걸로 그러냐.’ ‘웃자고 한 말을 다큐로 받아들인다.’는 등의 말로 상대의 감정을 깔아뭉개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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