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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됨됨이를 보려면 지리산을 함께 걸어라

무더위 절정에 떠난 부부의 지리산 종주 1탄

by 포롱


그렇게 가고싶던 지리산이었다. 그런데 짐을 싸는데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걷는 거리를 생각하다 보니 이것도 빼고 저것도 뺐다. 과일, 과자, 빵...맛있는 커피, 도시락 먹는 재미로 시작한 등산이 8년째 접어들고 있다. 여전히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건 어렵다.


설상가상 영등포역에서 사먹은 김밥이 체했나보다. 구례행 기차에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하루 열 시간씩 걸어야 종주가 가능하다고 했는데...천왕봉을 뒷산 댕기듯 고무신 신고 활보했다는 남편은 마누라의 컨디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리산 공부에 여념이 없다. 아니 그냥 산에 가면 되는거지 뭐 그리 챙기는 게 많으신지 20년을 함께 살아도 내 눈엔 아직도 외계인이다. 준비물부터 코스, 그리고 지리산의 역사까지 꼼꼼히 공부하며 산행 경로까지 머릿속으로 그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쉬려고 즐기려고 가는데 왜 저럴까?


어두컴컴한 시골역,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추천받은 모텔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주인이 특실에서 자라고 꼬셨다. 나는 얼릉 “네! 특실 주세요”라고 외쳤다. 남편은 옆에서 웃는다. 물침대 생각이 났을 것이다.


연년생 두 딸이 서너살 어린이집을 다닐 때였다. 독박 육아에 지칠대로 지친 딸을 위해 친정엄마가 구원병처럼 서울에 왔다. 주말 하루 손녀들 봐 줄테니 둘이 외곽으로 기분전환이나 하고 오라고. 김포 어디쯤 분위기 좋은 모텔을 찾아 물침대와 천정거울까지 있는 특실을 갔다. 그런데 멀쩡했던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 저녁을 잘못 먹었는지 후식 매실주스가 탈이 났는지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왝왝거렸다. 그 놈의 물침대 누워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시골 모텔 특실을 너무 기대했나 보다. 물침대는 커녕 침대모양이 원형이라 다리 긴 남편은 다리를 내놓고 자야했다. 천정에 어설프게 달린 동그란 거울에 자꾸 우리 모습이 보여 잠이 안왔다. 에어컨 소리는 10초에 한번씩 왱~하고 돌아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잠은 커녕 눈이 말똥말똥 했다.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잘자는 남편의 코고는 소리까지 신경을 거슬린다. 밤 10시에 누웠는데 시계만 쳐다보며 화장실 왔다갔다 하다 어스름 새벽이 왔다.


구례역 근처 식당서 남편은 설렁탕을 한그릇을 쓱싹 비웠다. 나는 또 탈이 날까 국물을 뜨는 둥 마는 둥. 오늘 하루종일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성삼재까지 가는 버스 기사 아저씨는 정말 배테랑급 운전실력을 자랑했다. 벼랑 끝 구불구불 산길을 묘기 부리듯 운전했다. 빈속에 들어간 설렁탕 국물이 속에서 요동쳤다. 와~ 대망의 지리산을 목전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집에 돌아가자고 해야 하나.

신발끈 매고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한 숨이 나왔다. 무사히 종주를 끝내고 두 딸이 있는 집으로 갈 수나 있을지 막막했다. 등산 가방은 또 오늘따라 왜이리 무거운지.


노고단 초입까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늘 산행에서는 남편이 뒤따른다. 보폭 차이가 커서 답답할만도 한데 늘 나의 보조를 맞춘다. 터덜터덜 유난히 느린 속도에 참다못한 남편 “아이구 우리 마누라 오늘 힘든가보네”

“으응!”

한마디로 끝!

이래서 남편과의 산행이 좋다. 설명하고 이해시키지 않아도 오해하지 않아서 편하다. 지지고 볶은 20여년의 결실 아니겠나. 완만한 오르막인데도 땀은 비 오듯 한다. 하지만 덥지는 않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바람이 시원하고 그늘로 연결된 산길에 기분이 좋아진다. 여름산행 간다면 다들 그 짓을 왜 해 하지만 그건 모르는 말씀이다. 오히려 여름 산행이 시원하고 좋다. 산속의 웬만한 길은 거의 그늘이어서 시원한 바람까지 불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낑낑 오르며 흘리는 땀은 저 도시의 에어컨 실외기와 아스팔트 열기로 쥐어짜듯 나오는 땀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시간을 오르니 노고단 고개가 나타난다. 노고단이 코앞에 있었지만 오늘은 이런 거 모두 패쑤! 맘에 안드는 남편의 직진 본능을 오늘은 무조건 따르기로 한다. 벽소령 대피소 가서 빨리 눕고 싶다.


노고단을 지나 본격 산행에 오르자 여름 들꽃이 사방으로 지천이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꽃들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앙증맞고 예쁘다. 우리 큰딸을 닮았다. 큰딸은 우리 가족에게 산소 같은 딸이다. 외모는 아빠를 쏙 뺐지만 눈물 많고 정 많은 날 닮아 우리가족 공감여왕이다. 늘 여유롭고 따뜻해서 큰딸은 옆에 끼고 살고 싶다는 남편. 하양 노랑 파랑 보라 분홍꽃들 사이에 이따금씩 툭 튀어 올라 주목을 끄는 황금빛 산나리꽃도 보인다. 그건 작은딸을 닮았다. 개성 강한 딸이 얼릉 자신과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길 산길을 걸으며 지리산 산신령님께 빌어본다.


요건 큰딸 현이, 요건 작은딸 진이 들꽃들에게 이름을 붙여가며 걷다 보니 반야봉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우리는 이것도 패쑤! 푹신푹신한 숲길이 능선을 따라 펼쳐지며 탁트인 전망을 이따금씩 선사하는 지리산을 기대했는데 실제 걸어보니 험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너럭바위도 많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길이 아주 지리~하다. 오늘이 올여름 최고의 폭염이라는데 이따금씩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꼬불꼬불 산길 거리가 어찌나 줄어들지 않는지 세걸음에 1m 계산하며 100m, 1km 줄여나갔다. 기운도 없고 베낭도 무거워 도저히 안되겠다. 숨겨온 비밀병기 하나를 꺼냈다. 곤약젤리다. 전날 베낭 무게 계산하는 남편 말 무시하고 몇 개 집어넣었다. 골바람 부는 곳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젤리를 입으로 쪽쪽 빨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남편과 사이좋게 반반 나눠 먹으려고 했는데 먹다 보니 혼자 다 먹고 싶은 사악한 생각이 든다. 먹어볼래? 마지못해 내미는 곤약젤리를 남편은 마다한다. 진짜?

사람은 위기의 상황에 인간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아! 40여년 그 수많은 교육으로도 난 이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인가. 사랑하는 남편에게 주는 곤약젤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다니. 반성하자, 반성해!



달콤한 기운에 발검음이 좀 빨라지나 싶더니 이내 또 축 축 처지고 느려진다. 곤약젤리를 하나 꺼내 또 쪽쪽 빨아본다. 이거 남편 건데. 에라 모르겠다 먹고보자. 점심으로 꺼낸 김밥은 목에서 막히고 초콜릿을 하나 꺼내 물어본다. 입안가득 모차르트 초콜렛을 살살 녹여 먹는다. 혼자 온 총각이 대견하고 안쓰러워 물 건너 온 귀한 초콜릿이라며 나눠줬다. 그래 내 인간성은 아직 쓸만해. 나의 오지랖이 남편은 싫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막 말 걸고 왜 저러나 하겠지? 뭐, 난 그래도 그냥 한다. 남편은 그 큰 초콜릿을 우적 우적 깨물어 몇 초만에 먹는다. 아니, 그 행복한 순간을 왜 한 번에 없애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 사람도 마누라가 못마땅해 하든 안하든 자기 소신대로 잘 살고 있다.


얼마나 걸었는지 드디어 내 머릿속 굵직한 이정표 연화천 대피소가 나왔다. 예쁜 대피소였다. 대피소 마당 한가운데에 콸콸 쏟아져 나오는 샘물을 물통에 담았다. 근엄하게 가라앉아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던 지리산이 산꾼들이 점심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에 친근하게 다가왔다. 나도 그 일행에 슬그머니 끼어 커피 한 잔이라도 끓여 먹고 싶었는데 직진본능 남편 눈치 보느라 그냥 출발했다. 연화천 대피소에서 벽소령은 4Km가 채 안되는 거리인데 우리는 세 시간도 더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나 때문이다. 일찍 가도 어차피 숙소배정은 6시가 넘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쉬엄쉬엄 많이 놀고 가자며 500m 마다 주저앉았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배낭에 어깨까지 아파왔다. 배낭 속 간식을 하나씩 꺼내 먹었다. 초코바 한 번 먹고, 쏘세지 하나 먹고, 쌀과자 하나 먹고...그러면서 짐을 남편 배낭과 내 배낭에 바꿔 넣었다. 쌀과자 같은 건 내 배낭에, 묵직한 간식은 남편 배낭에. 아! 힘드니까 또 인간성 드러나는구나.


딸들에게 얘기해야겠다. 그 사람 됨됨이를 보고 싶은면 지리산 종주를 꼭 함께 해보라고. 가만, 나 같은 마누라 얻은 울 남편은 어떻게 되는거지? 에이 모르겠다. 난 벌써 딸 둘이나 낳았고 이제 우리부부는 동지애와 의리로 사는 그런 부부가 됐다. 그렇게 나의 인간성을 탓하며 걷는 사이 오늘 등산의 종착지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 마당 데크에 배낭을 집어던지고 누가 보든지 말든지 큰 대자로 뻗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아 몰라!! 힘들어.

(2019.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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