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맞은편 등산객들의 소곤거림에 잠이 깼다. 9시 소등. 다시 잠을 자야 한다. 그런데 동창생 4명인 듯한 네 분이 숨죽여 얘기하며 깔깔거린다. 친구끼리 재밌겠다 부럽다는 생각도 잠시 벌떡 일어나 조용하라고 소리치고 싶다.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안 편하다. 얼마 후 다들 잠이 들었는지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쌕쌕 숨소리와 여기저기 코 고는 소리가 거슬렸다. 저녁부터 불기 시작하던 바람은 벽소령을 집어삼킬 만큼 요란해졌다. 둥글둥글 어디 가도 잠은 잘 잤는데 요즘은 잠자리에 예민해졌다. 오후 4시 이후의 카페인에 밤새 뒤척이는 날이 생겼다. 어느 날 남편이 잠이 안 와 애먹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날 초콜릿 한 조각을 먹었더라는 얘기에 얼마나 그를 비웃었는데 이제 내가 딱 그 짝이다. 갱년기의 시작인가? 다리 근육은 말할 것도 없고 배 근육까지 뭉쳐 아프다.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 맑아져 갔다. 아~~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새벽까지 뒤척이다 1시간 2시간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알람이 울린다. 새벽 4시다. 오늘 천왕봉 찍고 시골 어머니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깜깜한 어둠이 가라앉은 깊은 산에 바람이 분다. 사방은 어두운데 취사실 모퉁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무도 없는 취사실에 혼자 서 있는 남편이 보인다. 버너로 무언가를 끓이며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에 순간 심쿵!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남편의 옆모습이 멋지게 보였나. 세수도 못하고 머리도 뻗쳐있는 분명 꾀죄죄한 몰골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100미터 내리막을 왔다 갔다 하며 물을 길을 오고 햇반 데우고 짜장도 데웠다고 자랑했다. 얼른 먹고 천왕봉 가자고 채근하는데 아까 본 멋짐 폭발 설렘 사라진다.
세석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비인지 운무인지 계속 안개비가 내렸고 사방에 바람이 불며 스산한 기운에 무섭기까지 했다. 만나는 등산객도 없어 이 큰 산에 남편과 나의 툭툭 발소리만 들렸다. 걸음이 어제보다 빨라졌다며 컨디션 좋아졌냐 는 남편한테 심술이 난다. 오늘 일정 생각하면 어제의 속도로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정도는 아는데 젖 먹는 힘까지 내고 있다는 걸 자존심 상해 말하기 싫다. 못된 성질이 발동한다. 생애 첫 지리산 산행에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 것도 내가 최악의 컨디션으로 종주를 하고 있는 것도 전부 남편 때문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런데 이 남자 “허허 그래 나 때문이야 미안해” 이런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비라고 착각할 정도로 운무가 지리산 능선을 마구마구 휘젓고 있다. 몸이 휘청휘청하고 절벽 아래 낭떠러지는 멀리서 쳐다만 봐도 아찔하다. 빨리 걸어 이 산을 내려가고 싶다. 누가 지리산을 명산이라고 했나. 왜 사람들은 잠 못 자가며 오르는가.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고 빨리 이 종주를 마치고 싶다.
몇 시간을 걸어도 인적 하나 없던 산길에 맞은편에 여자 등산객 한 분이 보인다. 너무 반가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에요?” 그분은 장터목에서 자고 천왕봉을 찍고 지금 세석으로 가서 하산할 거라고 했다. 오늘 날씨 때문에 우리는 지리산 첫 등정이 망했다고 하니 깔깔깔 웃는다. 그런데 말투가 어딘가 모르게 정겹다. 어디서 왔냐니 안동서 왔단다. 어머 거긴 제 고향인데. 나이도 동갑이었고 나랑 2년을 함께 자취했던 단짝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그리고는 저번주에 다녀왔던 지리산이라며 핸드폰 속 또 다른 지리산을 마구마구 보여줬다. 천왕봉의 일출, 세석 평전의 풍경, 연화봉, 촛대봉의 멋진 모습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아이고~ 지리산이 절대 한 번에 보여주지 않지요. 지금 수년을 다녀 건진 몇 안 되는 보물인데 이걸 단박에 얻겠다고?” 유쾌한 그녀는 “다니다 보면 오늘 같은 날도 멋져요. 맨날 똑같은 날이면 재미없게?” 한다.
그렇겠지? 맨날 맑은 하늘에 멋진 구름만 있는 지리산 두 번 오고 싶겠나. 운무 없을 땐 여기가 멋진 포토존이라며 사진 찍어주고 그녀는 유유히 사라진다. 와~~ 내가 봐도 멋진 분이네.
비바람은 심해져 우비까지 꺼내 입으니 속도가 더 안 난다.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이 정말 대단하다. 고개 넘고 또 내리막 걷고 또 오르막 한 발씩 내디디니 어느덧 장터목이다. 대피소엔 산꾼들이 비를 피해 점심을 먹고 있다. 우리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 끼니를 꺼낸다. 햇반에 볶음김치와 멸치와 소고기 장조림이 전부다. 산에 와서 삼겹살 구워 먹고 찌개 끓이는 사람들을 남편은 이해 못 한다. 살 빼자고 운동 왔는데 무겁게 그런 걸 낑낑거리며 여기까지 와서 먹어야 하나 라며. 난 웃는다. 맘 속으로 난 그런 거 좋아해.
그런데 우리 옆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온다. 고급 일식집에나 있을 법한 길쭉한 나무접시에 초밥을 올려놓고 제대로 즐기고 있다. 너무 신기해 말을 걸었다. “와!!! 아저씨 초밥 드시네요” 난 이렇게 한마디 밖에 안 했는데 그 아저씨가 재료가 남았다며 그 자리에서 초밥을 한 접시 가득히 만들어서 주신다. 그리고는 후식으로 귀한 한차까지 권했다. 부산서 횟집을 하는데 새벽에 등산 후 골짜기 전망 좋은 곳서 구름 내려다보며 한 끼 잘 먹고 놀다 느지막이 내려가는 게 일상의 유일한 멋이라고 했다. 이분도 멋지시네!
천왕봉을 포기했다. 오늘 마누라의 걸음걸이로 봐서는 무리겠다 싶은 남편의 과감한 선택이었다. 아쉬웠지만 솔직히 좋았다. 그런데 중산리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만만치 않았다. 장터목서 내리막을 내려서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급경사가 끝도 없이 계속되는데 올라오는 사람은 깔딱깔딱할 정도였겠다. 조금 완만해진다 싶으면 다시 경사길, 끊임없는 내리막에 우리가 정말 높은 곳까지 올랐구나 싶었다. 3시간 30분 예상 길이었는데 쉬지도 않고 내려갔는데도 겨우 시간을 맞췄다. 무릎에서는 삐걱 소리가 날 것 같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파왔다. 땀에 젖은 온몸에서는 쉰내가 풀풀 나고 계곡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남편의 계획은 중산리서 버스를 타고 단성까지 가서 버스 갈아타고 다시 산청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을 고무신 신고 다녔다는 남편이 앞장선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리는 천근만근인데 자꾸자꾸 걷는다. 지리산 천왕봉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는 남편이 할아버지 한 분께 묻는다. 버스터미널이 어디냐고. 할아버지가 저 멀리 손짓하며 2km는 더 걸어야 한다고 한다. 와~~ 저 남편 고무신으로 한 대 맞고 싶나. 내 눈치를 슬슬 보던 남편이 “울 마누라 걷는 거 좋아하지?”한다.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아스팔트길에 남편 패대기치고 싶다. 지나가는 택시기사에게 산청까지 요금을 물으니 55000-60000원 부른다. 걷자! '정류장 가서 시원한 커피 사줄게' 남편의 감언이설이 난무한다. 신발 질질 끌며 2Km를 걸었다. 그런데 한 시간 넘는 배차 간격의 버스가 방금 떠났단다. 다음 버스는 1시간 반을 기다려야 하고. 그럼 어머니 못 뵙고 서울 가야 하는데. “택시 타자!” 으메~ 진즉에 탈 걸. (2019.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