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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l 30. 2023

'후궁전' 딸의 인턴 합격기

“고작 인턴 한 명 뽑는데 대표 면접까지?”

실무진에 이어 대표 면접까지 잡히자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딸을 통해 전해 듣는 요즘 취업시장의 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다. 정규직 채용은 언감생심, 인턴 기회도 잘 없어 ‘금턴’이라는 말까지 생겼단다. 이런 사정이니 고슴도치 아빠의 안타까움이야 말로 해서 뭣하겠나. “면접장 따라가서 옆에서 속삭여 주고 싶네. 얘 진국이니 뽑으라고.” 속 졸이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천하태평이다. 나는 대표 관련 기사와 인터뷰 영상을 링크 걸어주며 경영철학 중심으로 준비하라는 조언을 했다.  


“엄마, 끝났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전화기 너머 들리는 딸의 목소리가 아리송하다. 집으로 돌아온 딸은 대표와 1대 1 면접 이야기를 조잘조잘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 회사엔 젊은 대표만 혼자 있었단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초코우유와 과자를 먹으라며 건넸고 그 달콤한 간식 때문에 긴장감이 확 풀렸다고. 그게 인터뷰인지 뭔지도 모르고 주저리주저리 웃고 떠들며 한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뭔가 쐐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너무 솔직해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고 온 느낌? 지금까지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사전과제 속에 있던 스물셋 젊은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인턴 지망생이었는데 망했다는 느낌이 그제야 들었단다. “질문 자체가 달랐어. 단도직입적인 물음이 아니라 날 무장해제 시킨 후 날 것의 나를 말할 수밖에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더라고.” 예를 들면 왜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싶냐는 질문을 이렇게 했단다. 여기저기 지원서 많이 보내겠네요, 어디 어디 넣어 봤어요, 그런 채용 공고는 어디서 정보를 얻나요, 그럼 우리 회사도 거기서 봤겠네, 이런 식의 면접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준비한 말은 평소 관심 있던 회사였다, 그래서 늘 정보를 확인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그런 모법 답안이었다. 경험 없고 순진한 딸내미의 황당 대답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건 좀 창피한데 대표님이 긴장감을 어떻게 푸냐는 묻더라고.”

아무 생각 없이 중극 드라마 ‘후궁 견환전’ 본다고 했단다. 그리고 대표가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해보는데  창피해서 죽을 뻔 했다고 했다. 딸의 이야기에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다. 진짜 이 딸내미가 혼을 놓고 면접을 봤구나. ‘후궁전’은 우리 부부가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싫어하는 중국 드라마다. 80부작 가까이 되는 긴 시리즈인데 왕을 둘러싼 후궁들의 암투를 그린 아주 시시껄렁한 이야기다(이건 순전히 나만의 의견이다).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고민한다고 어쩌고 저쩌고 한 너의 소개서는 도대체 어따가 팽개치고~~!! 남편과 나는 안방에서 속삭였다. “이번 건 망했다고 봐야지. 젊은 애가 얼마나 생각 없이 보였겠어.”     


“드라마 좋아하는 엄마 닮아 저 모양이야.”

남편은 또 한마디 한다. 맞다, 나는 소설광에 드라마광이다. 미혼 때는 소설에 빠져 살았고 결혼해서는 드라마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퇴근 후 부랴부랴 저녁을 차려 먹고 딸들을 씻기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잠을 재웠다. 아이들이 잠들었다 싶으면 몰래 거실에서 TV를 켰다. 남들 눈엔 늘 그렇고 그런 막장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내겐 힐링의 시간이었다. 복잡한 상념을 잊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어 함께 울고 웃다 보면 피곤도 눈 녹듯 사라졌다. 어린 큰딸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어느새 내 옆에  찰싹 붙어 있곤 했다. 긴장을 막장 드라마 보며 푼다는 딸의 대답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어이, 후궁전! 먹고 싶은 거 없냐?”

며칠 동안 딸을 놀리던 남편은 서점에서 마케팅 관련 책을 몇 권 사서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놨다. 드라마 보지 말고 이런 책 읽으라는 무언의 잔소리다. 결과가 통보되고도 남을 만한 며칠이 지났다. 딸 눈치를 보던 남편이 급기야 나를 채근한다. “지금쯤은 연락 왔어야 하는데. 안 됐나 보다. 내가 먼저 물어볼까?”  딸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남편을 진정시켰다. 차라리 잘됐다며 너무 작은 회사라 맘에 안 들었다며 중얼거리는 남편. 다정도 병이라는 말은 딱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엄마, 됐어! 8월부터 출근하래.”

아침을 가르는 반가운 외침. 5일 만에 이멜 합격 소식을 전하는 큰딸. 엄마아빠가 하도 ‘후궁전’이 어떻고 저떻고 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단다. 젊은 이모처럼 느껴졌는데 역시 애정 어린 관심이었고 진솔함의 힘이었다며 웃는다. 딸의 출근 소식에 남편의 첫마디. “‘후궁전’이 합격했다고? 허 거참, 이거 놀랠 노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누구보다 딸을 믿고 희소식을 기다리던 아빠였음을 안다.      


 “엄마, 첫 월급 타면 용돈 줄게.”

딸의 출근복을 몇 벌 사줬다. 이런 부모 노릇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 얼릴 적 마트에 가서도 늘 엄마 지갑 속 돈을 다 쓸까 걱정이 많던 딸은 커서도 그런다. 헤헤 거리던 큰 딸,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나 집에 가서 ‘후궁전’ 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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