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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Sep 17. 2023

공룡케이크 앞에서  엄마 쬐려 보는 스물세 살

새벽부터 미역국을 끓였다. 소고기를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기장미역을 듬뿍 넣었다. 아끼던 미역까지 등장한 건 오늘이 작은딸 생일이기 때문이다. 미식가에 취향도 확실한 둘째는 생일상 메뉴도 직접 정했다. 아침은 미역국에 베이컨 떡꼬치면 땡! 저녁상은 스스로 연어장 덮밥을 만들어 먹겠다며 일찌감치 연어를 사놓으라고 주문했다. 고소한 미역국에 노릇노릇 구워진 베이컨 떡꼬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집을 나섰다.    

  

오늘 일정은 세탕이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청와대 북악산 코스를 후딱 걷고 여의도 집회 갔다 귀가 후 생일파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침부터 일정이 꼬였다. 지하철 파업 탓인지 산행 시작 시간이 한 시간이나 늦었다. 쉬운 둘레길이라지만 점심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경복궁에서 출발, 청와대 왼쪽을 통과하여 칠궁으로 접어들었다.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고 온몸은 땀범벅이 됐다. 비가 오려는지 후텁지근한 날씨에 바람 한 점 없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냉커피와 빵 한 조각으로 한숨 돌린다. 더 쉬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일행을 재촉한다.

“야, 오늘 나 엄청 바빠. 밥 못 먹고 갈지도 몰라.”

“안돼!  **와 ** 생일 산행인데 점심은 먹고 가야지.”

아뿔싸, 오늘이 친구들 생일산행이었구나. 그럼 막 뛰어야겠는걸.     

청와대 뒷산이 개방되고는 처음 와보는 둘레길, 돌담장 뒤로 서울시내가 펼쳐진다. 또 뒤로 보니 인왕산,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역사의 현장. 총알 박힌 소나무를 보며 긴박했던 역사의 한 장면에 감탄하고 있었다. 전화가 울린다. 큰딸이다.      


“엄마, 어디야! 아니 엄마딸 나한테 던져놓고 어디 갔어? 그 딸내미 지금 난리야. 엄마아빠가 자기 생일날 집 나갔다고.”

괜찮다고 그래서 일정 잡았는데 지금 와서 걔 왜 그러냐?”

“몰라. 지금 공룡 케이크 사 내놓으라고 생떼 장난 아니야.”

공룡 케이크는 또 뭐래.      


북악산 정상에서 빠른 하산길을 선택했다. 인사동 식당서 비빔밥 하나를 급히 먹고는 광화문으로 달렸다. 전철을 타고 국회의사당 앞 약속시간을 겨우 맞췄다. 집회 중간 또 전화가 왔다. 큰딸이다.      

“엄마, 여의도? 집에 언제 와? 뭐라고? 5시? 아빠는 결혼식 갔다가 회사 출근했어. 엄마딸 때문에 빵집 열 군데도 더 전화했어. 그놈의 공룡 딱 한 군데 있다고 해서 지금 이태원 가는 중이야.”     

도대체 공룡 케이크가 뭐야? 검색을 해본다. 남자 꼬맹이들이 환장하는 생일 케이크다. 피규어까지 들어있고 예약을 받아 제작하는 관계로 당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운 좋게 이태원 매장에 하나 있었나 보다. 초록색 공룡 케이크를 찾는 대학생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거대 공룡 한 마리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왕관을 쓰고 방방 뛰어다니고 있다. 언니를 조수 삼아 연어장과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만들면서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다. 엄마는 피곤하니 손도 꼼짝 말란다. 오호, 분위기는 괜찮네.

   

자기 생일상을 차리다 작은딸이 불쑥 내뱉는 한마디.

“엄마 낳아줘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 처음 듣는다.

주방을 왔다 갔다 하는 딸들을 보며 매년 되풀이되는 레퍼토리 시작해 본다. 남편 귀가 좀 따가울 것이다.     

  

연년생 두 딸  출산을 모두  혼자  해냈다. 첫딸을 낳을 땐 남편이 뉴스특보 한다며 수해현장으로 달려갔고 둘째를 낳을 땐 춘천에 파견 중이었다. 아픈 배를 붙잡고 입원가방 들고 병원문을 두드렸다. 보호자를 찾는 의사에게 딱 한마디 했다.

“보호자는 없어요.”

말로만 듣던 출산의 고통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진통중 자꾸만 전화 해대는 얄미운 남편. 힘내라는 말에 짜증나서 전원을 껐다. 열몇 시간 진통 끝에 딸을 낳고 나니 남편이 나타났다. 그러고는 한마디 한다. 우리 마누라는 순풍 애도 잘 낳는다고. 죽고 싶나. 힘이 조금이라도 남았었으면 머리털 다 쥐 뜯었을 거다.      


매년 듣는 에피소드인데도 딸들은 또 엄마 힘들었겠다며 맞장구 쳐준다. 그러는 사이 생일상이 완성됐다. 미역국을 내고 연어장을 냄비에 담았다. 토마토 샐러드가 예쁘다. 마지막엔 짠~ 하며 양주를 가지고 와 그럴듯한 칵테일까지 만들었다.      

딸은 여섯 살의 표정으로 스물셋 촛불을 껐다. 왕관을 쓰고 공룡 풍선을 안고 공룡 피규어가 꽂힌 초콜릿케이크 앞에서 웃었다. 그러다가 생일날 딸을 하루 종일 내팽겨 쳤다며 엄마를 쬐려 봤다. 야근 날짜를 바꾸지 않은 아빠는 센스 제로라며 흉도 봤다.      


손수 차린 생일 밥상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딸. 엄마도 먹으라며 권한다. 딸내미들 다 키웠다 생각했는데 어린애 같은 이 헷갈리는 상황은 뭘까. 초등학교 때까지 늘 선물 투정을 하던 작은딸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랑 투정은 여전한 대학생 딸을 보니 아직  부모 그늘 아래 있는 것만 같아 뿌듯한 마음도 든다. 자식의 인생에서 부모는 언젠가 떠난다. 이 슬픈 진리를 너무 일찍 깨달은 나는 앞으로 딸의 생일날만큼은 함께 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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