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리산서 잡은 여름 끝자락

by 포롱

새벽 알람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남편이 나갈 채비를 한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수리산 산행하러 간단다.

따라 가? 말아?

에잇 가자!!!

할 일을 다 팽개치고 함께 나섰다.


수리산역에는 낯익은 남편 친구들이 여럿 모였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불청객을 스스럼없이 반겨준다.

기태씨가 맛있는 커피 한 병을 건네준다.

KakaoTalk_20230827_194414311.jpg

숨겨 놨다 이따 힘들 때 먹어야겠다.

오늘 수리산 코스는 현우씨가 리딩해주신다.

어마무시한 크기의 막걸리가 가방으로 들어간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분다.

폭우에 폭염에 유독 힘들었던 올여름도 끝이 보인다.

평탄한 숲길이 산행의 시작을 기분 좋게 해 줬다.

‘배가 홀쭉해졌다’ ‘살이 쪘다’ ‘휴가는 다녀왔나’ 친구들의 수다 꽃이 폈다.

맨발로 걸어도 될 만큼 푹신한 길이 이어졌다.

오이 한 입 베어 물며 잠시 쉬어간다.

KakaoTalk_20230827_194414311_04.jpg

남편의 친구들은 늘 뷔페식 토크를 즐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장르를 넘나들며 재밌는 이야기를 펼친다..

오늘은 특히 영훈씨의 부부학 강의가 재밌었다.

‘아내들이여, 젊고 멋진 여인에게 눈 돌아가는 남편 구박 말라.

남편들아,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반성해라.’

생물학적 관점에서 절묘하게 해석해 주는데

인정하기 싫은데 자꾸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댁 갈 때면 늘 지나는 안양 평택고속도로의 수리산 터널 위

오늘은 남편의 친구들과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막걸리 먹자.”

현우씨 가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술과 안주들.

방울토마토, 자두, 육포, 포도, 배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술술 넘어간다며 자꾸자꾸 막걸릿잔을 기울인다.

KakaoTalk_20230827_194414311_07.jpg

이럴 줄 알았다.

쉬운 산은 없다.

500m도 안된다며 슬기봉을 너무 얕잡아봤다.

막걸리 먹고 오르는 오르막에 숨이 막 걸린다.

“우리 정상 지나왔어?”

정상석도 없는 정상을 한참을 지나고서야 알았다.

우리네 인생도 그럴까.

‘지금이 절정이다’ 감탄하며 살아야지.


산허리를 돌고 돌아 수리사에 도착했다.

고즈넉한 산사에 앉아 옹기종기 커피를 마셨다.

눈 막고 귀 막고 입 막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눈여겨본다.

KakaoTalk_20230827_194414311_10.jpg

한순간의 판단은 늘 예기치 못한 일을 부른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길이 땡볕 내리쬐는 임도 길의 연속이다.

기태씨가 뚝딱뚝딱 칡넝쿨 화관을 만들었다.

머리에 얹으니 시원하다.

코끝에 풀냄새까지 더해져 운치 만점이다.

봉숭아 이파리를 돌로 찧어 손톱에 물도 들여줬다.

아, 감성도 100점, 자상함도 100점!

KakaoTalk_20230827_194414311_16.jpg

갈치호수까지 5시간 12킬로를 걸어 산행이 끝이 났다.

예약된 식당에서 캠핑 온 것처럼 숯불에 돼지고기를 굽고 실컷 먹었다.

기분이 좋아서 조용한 게스트 컨셉을 잊고

소맥을 연거푸 들이키고 알딸딸해졌다.

분명 남편의 친구들인데 왜 이다지도 좋은가.


헤어지기 아쉬워 전철역 앞 커피 가게에 들렀다.

형원씨가 퇴직연금 DB형 DC형 투자 강의를 한참을 해줬는데

아직도 헷갈리고 모르겠다.

그러니까 퇴직연금을 어디다 투자하라고요?


종일 걷고 떠들고 웃고 먹고 놀았다.

하늘이 유난히 예뻤던 오늘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꽃은 붉어지고 열매는 익어가고 있다.

철없는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이,

내 친구가 돼가는 묘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KakaoTalk_20230827_194414311_21.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폭염엔? 계곡 트레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