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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일기장 훔쳐보기
10년전 '싸움닭' 제자가 새벽에 말을 걸었다!
by
포롱
Nov 19. 2023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열었다가 새벽 4시 무렵 카톡 문자에 깜짝 놀랐다.
병상에 계신 부모님 소식일까 싶어 야심한 시간 연락엔 가슴이 철렁하곤 한다.
다행히 10여 년 전 제자의 반가운 안부문자였다.
이 녀석은 이 늦은 시간까지 무얼 하느라 잠 못 들고 있었을까.
20년 가까운 교직생활을 하고 있지만 꾸준히 연락을 해오는 제자는 손에 꼽는다.
중학교 교복차림으로 뻔질나게 찾아오던 아이들도
고등학교를 가면 거짓말처럼 소식이 뚝 끊긴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면 또 드문드문 연락을 해온다.
자기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는 근황이 대부분이다.
대학생 정은이도 선생님이 그립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기억 속 정은이는 우리 반 싸움닭이었다.
6학년 2학기에 전학 온 정은이는 개성이 강한 아이였다.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이 강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자주 부딪혔다.
그해 우리 반엔 유난히 똑똑하고 학구열이 강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평범한 교과수업보다는 다양한 수업방식을 시도했고
아이들도 잘 따라와 꽤나 교사로서 보람을 느꼈던 해였다.
지금은 보편화된 ‘거꾸로 수업’(아이들이 교과내용을 미리 영상으로 공부한 후 수업시간에 토론)과 ‘하브루타 수업’(질문과 토론 위주)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이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요즘엔 학원수업에 쫓겨 사전 과제학습은 엄두도 못 낸다.
독특한 학급 문화에 정은이는 적응을 잘 못하고 겉돌았다.
무리가 지어진 여자아이들은 거친 전학생을 멀리했고
남자아이들도 정은이를 괴물 취급 했다.
그럴수록 정은이는 공격적으로 변해 입도 거칠어졌다.
수시로 집 얘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엄마가 휴대폰을 박살 냈다고
아침부터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정은이와 얘기할 때면 분노 가득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먹었다.
6학년 2학기에 전학시킨 부모님에게,
전 학교와 완전 다른 교실 시스템에,
우호적이지 않은 친구들에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다 “힘들지?” “속상했겠다.” 선생님의 위로 한마디에
눈물을 왈칵 쏟는 여린 면을 보였다.
겨울방학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한 아이들이 전날 정은이네 집에
경찰차가 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은아, 집에 뭔 일 있었어?”
“...”
“말하기 힘든 거야?”
“네...”
선생님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오후 정은이 어머니께서 학교로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 우리 정은이 어떡하면 좋아요.”
정은이 어머니는 만나자마자 하소연부터 쏟아내셨다.
늦둥이로 낳아서 오냐오냐 키웠고, 나이차 많은 오빠가 하나 있다고 했다.
학군 좋은 데서 중학교 보내고 싶어 이사를 했는데 그게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하셨다.
성격이 원래 세지만 요즘은 너무 심해져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한숨을 쉬셨다.
“이건 원 창피해서 어디 말도 못 하겠어요.
어제는 가정폭력으로 저를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차가 집에 오고 난리 났어요.”
순간 어머니 앞에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이고, 우리 정은이라면 충분히 그러거도 남을 캐릭터지.
10여 년 전이었으니 가정폭력법이 막 입법된 초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보편화된 법이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했는데
수업 중에 슬쩍 지나가면서 했던 말을 제대로 기억하고 써먹었다.
상담 내내 그동안 봐온 정은이의 성격과 특징을 얘기하며
어머니 세대와는 달라진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해주며
이젠 매 들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다.
졸업하던 날 정은이에게 해준 말도 생각난다.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
똑 부러지던 정은이는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학과를 가서 즐겁게 다니고 있다고 했다.
몇 줄 안 되는 근황 소식에 옛날 정은이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성질 박박 부리던 열세 살이 잘 지내고 있다니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렇다.
옛 스승을 찾는 제자들은 대부분은 나의 관심과 걱정을 온통 독차지하던 녀석들이다.
스카우트 수업 몇 달이나 빼먹고 도망갔던 재국이,
부모님 새벽장사 나가서 늘 지각했던 채연이,
싱글맘 엄마가 불쌍해 미치겠다던 현정이,
친구 한 명 없이 외로웠던 정은이까지.
재국이는 휴가 나오면 꼭 술 사달라는 부탁을 하고 군대를 갔다.
매일 모닝콜로 깨워줬던 채연이는 헤어아티스트가 돼
제발 자기 미용실에 한번 와달라고 한다.
현정이는 선생님처럼 교사가 되고 되고 싶다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다.
제자들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 쏟아내고
미용실 사장 험담을 하고
공부 스트레스도 쏟아내는 모습을 볼 때면 아직도 내 눈엔 어린 학생처럼 보인다.
올해도 6학년 제자들과 지지고 볶고 있다.
하루도 순탄치 않지만
그 과정과 시간이 그 아이들을 단단하고 야물게 하리라 믿는다.
새벽 4시 옛 제자 정은이가 6학년 반쪽자리 담임을 기억하고 문자를 보냈다.
창작의 스트레스로 잠 못 들다 옛날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난다고.
‘힘들지?’라는 위로가 필요했을까.
힘들었던 과거의 상처가 덧난 건 아닐까.
나의 제자들이 옛날 선생님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현재를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문득 초딩시절이 생각이 난다면
마음 한편 내준 선생님에 대한 기억 한 번으로도 족하다.
단순한 안부문자에도 이렇게 또 쓸데없는 걱정이 늘어지니 난 참 못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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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롱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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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포롱쌤의 브런치입니다. 뭐 하나 특출 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주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교사. 최근 '어서오세요. 좌충우돌 행복교실입니다'를 공저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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