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롱쌤 Mar 03. 2024

밀크티에 '풍덩'

-산에 갔다가 집 오는 길에 밀크티 먹자.

-동네 한 바퀴 크게 돌고 밀크티 데이트 어때?

-오늘 나 아르바이트비 들어왔는데 밀크티 쏠게.

-어제는 미안했어. 밀크티 먹을래?     

우리집 파티 음료는 무조건 밀크티

우리집 공식 음료는 밀크티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도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인지 모든 소통의 매개체는 밀크티다. 우리 가족이 밀크티 애호가가 된 지는 꽤 오래됐다.     

큰딸이 대학 입학 후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다. 공교롭게도 첫 일터가 백화점 밀크티 매장이었다. 엄마 닮아서 허당끼 가득한 딸의 첫 사회생활, 제대로 설거지나 할지 손님 응대는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또 그려봤지만, 상상이 안 됐다. 밀크티를 생전 사 먹어 보지도 못했던 내가 그런 가게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우유를 집에서 데워먹지 뭘 사 먹어? 사실 음료보다는 딸이 일하는 모습이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딸은 자기 일터 근처엔 얼씬도 말라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할 리 없잖은가.


어느 날 남편과 몰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매장에 잠입했다. 주말 아르바이트라 늘 손님이 너무 많다고 했는데 진짜 손님들이 줄까지 서서 주문을 기다렸다. 넓지도 않은 공간에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우리 딸 어딨지? 익숙한 모습의 딸이 빨간 유니폼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주방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초보 딸은 며칠 전 끓은 펄을 옮기다 넘어져아우리를 걱정하게 했다. 화상을 입지나 않았나 그 걱정뿐이었는데 딸은 다시 펄을 끓이느라 오픈 시간이 늦어서 너무 죄송했다는 말만 했다. 마냥 어리게만 봤던 딸이 음료를 제법 능숙하게 만드는 모습에 넋을 잃고 한참을 봤다. 남편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발바닥도 다리도 아프다는 말이 생각났는지 이내 걱정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음료수길래 사람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기다리지? 할머니도 학생도 아줌마도 젊은이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고객층이 신기하면서 의아했다.      

운전중 피곤함은 밀크티로 달랜다.

어느 날 딸은 밀크티 석 잔을 들고 집으로 왔다. 정확히 말하면 블랙 밀크티다. 본인이 직접 끓인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한 요걸 먹어봐야 한다며 컵의 반을 펄로 채웠다. 굵은 빨대로 쭉 쭉 빨아먹으란다.  

어라? 오~ 달콤하고 부드럽다. 세상에 뭐 이런 음료가 있어? 그리고 입안으로 빨려 들어온 펄을 씹었다. 그런데 이게 또 기똥차다. 떡이야?젤리야?  딸에 설명에 의하면 타피오카라는 녹말로 만들었단다. 시원한 음료를 쪽쪽 빨고 씹어먹다 보니 순식간에 바닥이 보인다. 펄 때문인지 간식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기까지 했다. 신세계를 경험한 우리는 퇴근하는 딸의 손을 쳐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블랙 밀크티 예찬론자가 됐다.

딸과 기차여행 갈 때는 무조건 밀크티 한잔

이제 커피 말고 이거 먹자. 남편과 의기투합해 처음 매장을 방문하던 날의 황당함은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블랙밀크티 한 잔 달랬더니 얼음은 얼마큼 넣을 거냐, 당도는 어떻게 할 거냐, 펄은 추가할 거냐 온통 낯선 언어로 자꾸 묻는다.

“처음이라 잘 몰라요. 그냥 적당히 주세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베테랑이다. 달달함을 좋아하는 남편은 당도 50, 난 30! 계절에 따라 얼음양도 조정이 가능할 정도로 능숙하게 주문한다. 쿠폰적립도 알아서 하고 어쩌다 할인 행사도 챙길 줄 아는 충성도 높은 고객이 된 것이다.

여행을 갈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지역 밀크티 매장을 방문한다. 부산, 대구, 전주, 대전, 제주도 등 어디를 가더라도 필수 코스다. 시골집을 다녀오다 차가 막혀 슬슬 짜증이 올라올 때면 자연스럽게 매장을 검색한다. 조 앞 요금소서 20분 정도만 가면 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운전대를 돌려 톨게이트를 빠져나간다.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를 사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하면 거짓말처럼 기분 전환이 된다. 밀크티 매장이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거쳐 동선을 짜기다 한다. 주머니 사정 안 좋은 대학생 두 딸은 금요일 첫 강의를 늘 밀크티와 함께한다. 일주일을 열심히 생활한 스스로 주는 상품이라나 뭐라나.

남편과 나는 주말 등산 후 꼭 밀크티 한잔의  사치를 한다. 쪽쪽 빨며 아껴먹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1분도 안 돼 다 후루룩 들이킨다. 그리고서는 내 음료를 호시탐탐 노린다. 눈독 들이지 말라고 협박해도 어느새 남편 손에 내 음료가 들려있다.

“앞으론 당신, 점보 사이즈 사라고!”

티격태격 집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딸들도 먹고 있다.

“두 분도 먹으셨죠? 우리도 배달시켰어요! 헤헤.”

“일주일에 한 잔만 먹어! 두 번은 심한 거지!”     

남편과 등산후 밀크티 데이트

최근엔 작은딸 캠퍼스 안에도 밀크티 매장이 생겼다. 안 가볼 수 없지. 공부 삼매경 젊은이들 틈에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달콤한 밀크티 향을 즐겼다. 근무지 근처에도 밀크티 파는 곳이 등장했다. 동료들을 이끌고 거하게 한번 쏜다. 나에게도 맛있으니 그들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밀크티 매장이 많아지니 찾아다니는 재미는 줄었다. 하지만 접근성이 좋아지니 찾는 횟수가 급증했다. 나의 취향을 알게 된 지인들도 밀크티 쿠폰을 건넨다. 밀크티가 점점 좋아진다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밀크티홀릭들의 로망, 어쩌면 대만행 밀크티 여행계가 생길  다.     

작은딸의 캠퍼스안 밀크티 가게

“나중에 퇴직하면 밀크티 팔까?”

남편이 묻는다. 오~노!!! 맨날 우리 식구가 다 먹어 남는 게 없을 거다.  사실 요렇게 소중한 건 감질날 때가 제일 맛있음을 살아보니 알겠다.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하지만 하늘은 눈부시게 맑다.

시원한 밀크티 한잔하기 좋은 날이다.

밀크티홀릭 선생님을 위한 우리반 벼룩시장 밀크티 가게.   당도는 설탕 한숟가락 추가, 펄 추가는 젤리를 입속에 넣어주면 끝!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