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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Feb 04. 2024

아빠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남편은 늘 새벽에 출근 후 늦은 밤에 퇴근했다.

이십여 년 그랬던 그가 사십 대 후반 커리어 정점을 찍어야 할 시기에

한직을 돌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우리 집엔 훈기가 돌았다.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진 남편,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아빠.

집안 풍속도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한가롭게 책을 읽고 네플릭스를 훑고 운동을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가족들마저도 여유롭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설거지를 하고 밥까지 해뒀다.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라면과 계란 프라이 밖에 없던 사람이

국이나 찌개, 볶음 요리 솜씨를 자랑했다.

분리수거나 음식물 쓰레기도 도맡아 하는 통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을 정도의 호사를 꽤 누렸다.

요령 없이 대충 제멋대로 하던 엄마의 집안일이

아빠가 하니 체계적이고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딸들의 칭송도 높았다.

딸들도 한가한 아빠 덕을 톡톡히 봤다.

등굣길 짐꾼으로 부리기도 했고 맛있는 커피 배달도 시켰다.  

여기저기서 수시로 남편과 아빠를 불렀다.

“여보, 빨래 갠 거 어디 갖다 넣었어? 빨간 티가 안 보여.”

“아빠, 학교 늦었는데 차로 좀 태워줘.”

“아빠, 오늘 닭 누룽지탕 해줄 수 있어?”

집안에서 존재감 높아진 남편

한 번씩 툴툴거렸다.

“이거 아빠 권위가 땅에 떨어졌어. 큰일이야 큰일!”

아빠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수년만에 남편이 다시 바빠졌다.

땅에 떨어진 아빠 권위는 솟구칠 수 있을까.

거대한 축하 화분 두 개가 집으로 배달됐다.

현관문을 들어서던 두 딸의 반응.

“무슨 화분이에요? 아빠한테 온 거예요? '축' 밖에 못읽겠네.”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방으로 들어간다.

어렵지도 않은 한자를 모르는 대학생 두 딸이 한심하다.

     

얼마 뒤 남편이 퇴근 후 집으로 들어왔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묻는다.

“애들이 화분 보고 뭐래?”

“별 말 없던데? 왜?”

“저거 보고 아무 말도 없어?”

“응! 그나저나 왜 집으로 화분을 배달시켰어?”

“아니, 부엌데기 아빠가 그래도 좀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거 보여 줄라고 그랬지.”

헐... 그렇게 깊은 뜻이?

이 남자 좀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런데 어쩌냐. 애들이 ‘영전’ 한자도 모르고 뜻도 모르던데.


그날 저녁밥상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아빠가 잃어버린 권위를 좀 찾으려고 일부러 화환  몇개 집으로 보냈다는데

너넨 왜 한자도 못 읽냐고!”

남편의 서운함을 대신 말해주니 딸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장난기 발동한 둘째 딸이 그런다.

“어이구~~ 아버님 그러셨어요? 그럼 앞으로 직책 붙여 불러드려요?”

“너네가 아빨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우습게 생각 한 적 한 번도 없는데요.”

옆에 있던 큰딸도 맞장구친다.

“맞아, 엄마 몰래 공차 사주던 아빠 이젠 낮에 못 보는 거야?”

“그럼 이제 바쁠 때 아빠 찬스 못 써? 아유 아쉬워라.”

두 딸의 의외의 반응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은 남편의 표정.     


요즈음 바쁘다고 청소도 분리수거도 자꾸 미루는 남편.

“어유, 아버님 오랜만에 보네요. 얼굴 잊어먹겠어요.”

능글능글 작은딸.

“아빠!! 요즘 맘에 안 들어. 바빠도 할 건 해야지!”

큰딸도 눈 흘기며 한마디 더 보탠다.

우리 집 아빠의 권위는 도무지 다시 찾을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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